길 저쪽은 슬픔
고민 2024/09/2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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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저쪽
- 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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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6
- : 589
이런 소설을 읽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갈하고 깊은 문장,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곱씹어야 하는 내용. 그 안에 숨은 뜻을 내가 알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알 수 있는 자격이 될까 싶은. 읽는 것이 송구스럽다는 느낌을 처음 가져본 소설이었다. 아마 그것은 역사 속 인물들의 실체를 만난 듯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불온한 책으로 배웠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을 통과한 이들이 살아 숨 쉬며 내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이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대에 태어나고 자랐다. 그들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하며 들이마셨을 최루가스를 나 역시 함께 마셨다고 하면 이상한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인근에 대학교가 있었고, 어느 날들의 하굣길에는 맵고 따가운 공기 때문에 눈물 콧물 흘리곤 했다. 당시에는 그것의 정체를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 시기가 광주항쟁 이후부터 87항쟁 무렵이었구나 싶었다. 초등학생 시절에 맛본 최루가스 덕분인지 나는 대학생이 되면 당연히 ‘데모’를 한다고 생각했다.
‘데모’가 대학생의 본분인 줄 알고 자란 나는 대학생이 되기도 전에 ‘데모’를 알아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느 날 학교 정문 앞에서 유인물 한 장을 받아 책가방에 챙겨 넣었는데 그것의 내용은 전교조 교사를 지지한 이유로 부당한 폭력을 당하고 자살한 고등학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 유인물을 받은 모든 학생들이 그 사안에 관심을 가졌을 리는 없다. 그런데 나는 관심을 가졌고 유인물을 배포한 청소년 단체와 연결이 되어 ‘데모’의 세계로 발 딛게 되었다. 왜 어떤 아이는 유인물을 무심히 버리고 어떤 아이는 가방에 챙겨 넣을까? 왜 어떤 사람은 제 살 길을 가고 어떤 사람은 죽을 길을 갈까.
유인물을 책가방에 챙겨 넣었던 청소년은 성인이 되어 제 살 길을 갔다. ‘데모’는 계속되기 어려웠고, 예상치 못했던 사건을 만나 뜻하지 않았던 인생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인생길은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맨날 무엇이 비어 있었기에 고통스러웠다. 모색이 필요했고, 열일곱 살 때 받았던 유인물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지 다시 ‘데모’의 세계로 한 발 내딛게 되었다. 한 발이 두 발이 되어 더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세계에서 웃고 울며 또 한 번의 인생길을 가게 되었다. 그전에 갔던 길보다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무언가 비어 있다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길 이쪽에 있으면서 길 저쪽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길 이쪽은 뭐고 길 저쪽은 뭘까. 김준일의 말을 빌자면 길 이쪽은 역사이고 길 저쪽은 꿈인 것 같다. 그가 변혁운동을 하면서 괴로워했던 ‘역사와 꿈의 격절’이라는 말이 길 이쪽과 길 저쪽의 괴리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가 권력이 이끄는 수레에 불과’하다면 민중은 소외되고 역사를 통한 변혁의 꿈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역사에 뛰어든 '젊은 혼'들의 꿈은 권력이 아니라 변혁이었고, 그들은 5월 광주를 통해 역사와 꿈이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이후 더 많은 젊은 혼들이 ‘자기희생의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죽을 각오로 꿈꾼다는 것, 감히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죽을 각오는 실제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해방광주를 통해 ‘윤리적 분노’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투쟁했듯이, 후대들 또한 그들이 겪었던 정치권력의 폭력에 분노하고 그들의 죽음에 빚진 마음으로 투쟁을 이으며 꿈을 꾸었다.
나도 그 후대 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기희생의 결단도 아니었고 죽을 각오도 없었지만,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역사와 앞선 세대들의 희생을 배우며 변혁을 꿈꾸었던 때가 있었다. 책가방 속 유인물은 사는 동안 불쑥불쑥 튀어나와 질기게 영향을 미쳤고 나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럴 때 내게 길 이쪽은 변혁운동이었고, 길 저쪽은 미지였다. 저쪽은 가지 못한 곳이기에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이쪽과 다르기만을 바랐다. 그만큼 길 이쪽에서 나는 내내 흔들렸고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역사와 꿈 사이에서 번민한 것이 아니라, 역사도 꿈도 외면하고 싶어서 번민했고 끝내 떠났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길 이쪽도 저쪽도 아닌, 길 이쪽이기도 하고 저쪽이기도 한 곳에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제 이쪽과 저쪽의 구별이 없는 나만의 장소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떠나온 길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그 길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멀지 않은 곳. 역사와도 꿈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 자기희생도 죽을 각오도 필요 없이, 내 마음이 닿는 곳까지만 가도 괜찮다는 믿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역사도 꿈도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나는 그저 내가 살아갈 의미를 찾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그러다 보면 나의 의미와 역사가 만나기도 하고, 나의 의미와 꿈이 가까워지기도 하리라. 내가 이렇게 여기는 것은 내게도 윤리적 분노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살아남은 자의 존재다. 권력의 폭압은 사라지지 않고 그로 인한 죽음은 계속된다. ‘내가 살아남은 것은 나를 대신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문장은 진실이다. 죽음의 역사가 있었기에 삶의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역사와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 자체를 위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희우의 말처럼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갈 의미를 찾는 것도 살아남았기 때문이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슬픔이 살아갈 의미를 찾게 한다. 그러고 보면 길 저쪽은 꿈이 아니라 슬픔인가 보다. 역사를 통한 꿈보다 역사로 인한 슬픔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지도 모른다. 어디에 있든 슬픔만은 잃지 말자.
(202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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