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일 때 그는 아마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떠난다. 새롭고 신기한 것을 보기 위해 그들은 떠나지만, 모험에서 자신들이 조금 파괴되는 것을 느낀다. <만난 사람>에서 소년들은 배를 타고 길 건너 항구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이상한 사람 때문에 소년의 마음은 부서진다. 그 이상한 사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기댄 친구를 사실 “멸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의 마음을 간직할 수 없다.
<애러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년은 토요일 저녁에 있는 시내의 바자에 꼭 가고 싶어한다. 바자에 가는 계획이 조금 지연되지만 그는 기어이 밤 늦게 혼자서 바자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바자는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무언가를 사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그가 너무 늦은 것일까, 아니면 바자란 원래 그런 곳이었을까. 알 수는 없다. 그는 그저 이렇게 생각한다. “그 어둠 속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자니까 나 자신이 마치 허영에 몰리고 또 허영의 조롱을 받은 짐승만 같았다. 그리고 내 두 눈은 고뇌와 분노에 활활 타고 있었다.”(43)
친구들과 실컷 밤을 새고 허세롭게 트럼프를 하며 돈을 잃은 청년(<경주가 끝난 뒤>), 여자 꼬시는 일로 실컷 잘난 척을 하지만, 여자에게 몸을 팔고 결국 금화 한 닢을 손 안에 넣은 레네한과 코얼리(<두 부랑자>), 도시로 떠났던 친구 갤러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천한 취향을 탓하고 어린 아이를 울려버린 꼬마 챈들러(<구름 한 점>), 팔씨름을 하다가 술값을 내게 되어 집으로 돌아온 패링튼은 어떠한가. 그는 괜히 아이에게 분풀이를 한다. 아이는 두 손을 모아 높이 쳐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때리지 마세요, 아빠! 저 아버지를 위해 기도 드릴게요…….아빠, 때리지 않으면 기도 드릴게요……기도 드릴게요…….”(<분풀이>)
아일랜드로 흘러들어오는 것, 즉 영국으로 대표되는 자본과 영국 왕의 환영 인사를 이야기하다가 문득 죽어버린 아일랜드의 국민당 당수 파넬을 떠올리는 <10월 6일의 위원실>사람들, 음악회에서 딸의 권리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비난 당하는 <어머니>, 술집 계단에서 넘어져 다친 자신을 위해 찾아온 친구들에게 강제로 개종을 당하는 커난. (<은총>) 커난은 결국 그 제수이트 성당에 나가 앉아있지만 그날 설교는 커난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다. “예수는 우리 인간의 사소한 잘못도 이해하시고, 타락한 본성의 약점도 이해하시고, 이 세상살이의 여러 유혹도 이해하십니다...만일 여러분의 장부가 모든 점에 있어 잘 부합되면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자 수지계산을 맞춰보았더니 다 잘 되었습니다.’라고.”
부서진 마음들은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다. 이 마음은 잊혀진 것 같지만 오래도록 사람의 마음에 숨어있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 <死者>는 이 부서진 마음을 오랜 뒤에 해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온갖 사람이 초대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뒤, 가브리엘은 부인이 어떤 노래를 듣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질투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 질투의 대상이 실은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자임을 알고서 그는 망연자실한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밑에 서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른 모습들도 그 곁에 보였다. 그의 영혼은 무수히 많은 죽은 사람들이 사는 영역으로 벌써 다가갔다. 걷잡을 수 없이 어른거리는 死者들의 존재를 그는 의식하면서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290-291, <사자死者>)
부서진 마음은 꼭 죽은 사람들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것이리라. 죽은 사람들이 살던 세계는 허물어지고 없어지지만, 결국 그 죽은 사람들의 부서지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부서진 것들을 꼭 쥐고 싶어한다. 사실 조이스의 인물들은 자기 안에서 뭐가 부서져 나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조이스는 그 부서진 것들을 알기 위해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 사람들이 의미없이 흘려버린 그 행위들을 읊조리며 놓친 시간대를 더듬거린다.
아프게도 삶에서 파괴되는 것들은 언제나 내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아마도 붙잡고 싶어하는 것도, 부서지는 것을 애닯아 하는 것도 내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정박해 있는 것일까. 아니 정박해 있기나 한 것일까. 이렇게 끝없이 흔들거리며 헤매는 마음이 과연 내 것이기나 한 것일까. 조이스는 그런 흔들리는 수많은 마음, 이미 파괴된 것들과 자신을 향해 떠밀려 오는 새로운 것들 앞에 서 흔들리는 자신의 이름을 ‘더블린 사람들’이라고 호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