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여가 활동은 “신경을 쓸 수 있는 여력을 엄청나게 잡아먹고, 성찰, 명상, 몽상에 잠길” 틈을 주지 않으며, “끊임없이 별 것도 아닌 목표를 겨냥하게 해 쉽고 흔해 빠진 만족만 맞보게끔” 만든다. 그래서 신노예들이 언제나 재미보기를 앞다퉈 원하는 사회에서는 야만이 문명을 압도한다. 혹은 취향보다 범속이 선호된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오늘날의 노예들이 ‘여가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은-시청각적인 것, 전자통신 기기, 과시적인 스포츠 활동, 흥청망청 노는 모임, 한창 인기 있는 가수들의 공연, 여행, 동호회, 인터넷 채팅 등에 미친듯이 탐닉하며 쏟아붓는 그 모든 시간은-모든 면에서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여가’와 정면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모든 이를 위한 기분 전환 프로그램으로 자신들의 몰개성적인 욕망을 채우려 드는 반면, 고대인들은 일에서 물러나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한때를,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에 좋은 시간을 오래도록 누렸다. 세네카는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간의 가치, 하루의 가치를 아는 자, 자기가 매일 죽어간다는 것을 아는 자를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아는가? 우리의 과오는 우리가 장차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라네. 사실 죽음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우리의 지난 삶은 죽음에 속한 거라네.”
따라서 고대의 현자는 게으름을 잃어버린 시간의 ‘회수’로서 권고해마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은 도둑맞은 시간이요, 도둑맞은 시간은 신경쓰지 못한 채 흘려보낸 시간이다. 심지어 소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벗 미니키우스 푼다누스에게 이렇게 권유한다.
“자네도 할 수 있는 한 소란, 공허한 번잡스러움, 흥미 없는 일을 떠나 면학적인 휴식을 취하게나. 친애하는 아틸리우스가 재치있고 세련되게 말했던 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부산하기보다는 게으름을 부리는 편이 백번 낫다네!"(32-33쪽)
삶은 곧 고통이라는 것에 대한 증언 행위가 글쓰기라면, 고통 없는 삶을 누린 자의 증언은 아무 가치도 없다. 프루스트는 '행복'만큼 작가에게 비생산적인 것은 없다고 했다. 이 지적은 모든 예술가와 철학자에게 적용된다. 건강, 부르주아의 안락, 평온한 나날은 예술가에게 사회적 의무, 사교계 생활 온갖 종류의 번잡함이라는 '여흥'을 마음먹게 한다. 그 속에서 예술가의 마음과 정신은 상실되고, 존재와 사물에 대한 경험은 빈곤해진다. (71-72쪽)
....문학적 풍류를 아는 이, 궤변과 요설의 문학적 가치에 민감한 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역자후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