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내 서재
  • 재와 빨강
  • 편혜영
  • 11,700원 (10%650)
  • 2010-02-25
  • : 1,228

아는 사람은 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를 편혜영이라는 작가가 있다. 편혜영은 문학동네, 문학과 지성사에서 소설을 펴내며 몇 개의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천히, 그러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세계를 축조해 나갔던 이 작가가 올해 초, 등단 10년 만에 첫 번째 장편소설을 펴냈다. 물론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다렸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으므로)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자기만의 걸음으로 이제 장편이라는 세계에 막 첫 발을 내딛은 작가는 이 <재와 빨강>이라는 소설로 기다렸던 세간의 모든 기대를 충족시켰다. 아직 많은 평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책을 펼치면, 이제 막 C국에 도착해 공항 검색대에서 수색을 당하는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다국적기업의 해외지사에서 일하다 본사로 파견을 나가게 된 한 사나이의 모습이다. 이국의 낯선 풍경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풍경이다. '몰'이라는 이름, '4구역'이라는 장소 등, 소설의 끝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배경과 스토리, 인물 등에 대한 전개(또는 묘사)의 보편성은 일부러 만들어내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세련됨이다. 그것은 마치(지금은 제작비를 어느 정도만 들여도 가능하지만)<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며, 9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그 촬영기법의 세련됨을 처음 느꼈던 순간의 희열과도 같다. 판타지의 테두리를 쓴 이야기의 외형은, 비약하자면, 우리도 <어린 왕자>나 <변신> 처럼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소설을 써 낼 수 있다는 인증처럼 느껴지게도 만든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소설의 빛나는 부분은 그 외형을 충족시켜주는 디테일이다. 언어가 (거의)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자신의 아내를 죽인 범인으로 몰리고, 부랑자로 전락하며, 그 나라의 치명적인 유행성 질환을 앓고, 급기야 살인용의자에서 살인자로 변해가는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작가는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타당한 일인지, 그러한 심리 상태인지, 주변의 상황이 그러한지 끊임없이 묻는다. 독자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왜, 왜, 왜, 왜, 왜...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소설이 나온다는 것을 이 작가는 잘 안다.

핵심을 이야기하려면, 미안하게도 앞서 이야기한 소설의 줄거리를 부정해야 한다. 사실 주인공은 언어가 (거의)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아내를 죽였다는 확증도 없으며, 끝까지 부랑자로 남아있지도 않고, 치명적인 유행성 질환의 증상만 있을 뿐 죽음에 이르지도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이 완성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한 인간이 끝없이 몰락하는 데에는 확증, 또는 현상이 필요없다는 것. 다만 실체가 놓일 자리에 욕망이 있다는 것. 그것이 몰락의 당위를 제공한다는 것. 그렇게 보았을 때, 이 소설은 비로소 무서워진다.

카프카의 단편들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재와 빨강>은 몰락의 끝에 서 있는 우리의 자화상과 닮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부조리가 곧 나의 부조리와 맞닿아 있을 거라는,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디스토피아엔 세계의 몰락이 아니라, 나의 몰락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실한 예감.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불안해 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