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전이었는데, 문득 헌책방엘 가고 싶어졌다.
생전 헌책방이라곤 가본 적도 없건만, 어째서인지 헌책방이라는 그 작고 허름한 이미지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퍼지더니, 작은 골목과, 팬을 갈지 않아 덜덜거리는 회전식 3단 선풍기와, 금테 안경을 쓴 사장님과, 그나마 먼지가 앉지 않아 구입을 고려하게 되는 덜 오래된 책들과, 그 덜 오래된 책의 받침으로 사용되는 아주 오래된 책들과, 시큼텁텁한 지하의 책곰팡내와, 출입문 입구에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 같은 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내 머릿속의 공간들을 가득 메워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느 평범한 날 헌책방을 찾아간 것과, 그곳에서 다행히 '덜 오래된 책'으로 남아주었던 한 권의 <상실의 시대>와 10여 년 만에 다시 조우하게 된 건, 어쩌면 운명적이라고 불러도 되는 그런 멋진 일이 아닐까.
사실 <상실의 시대>는 그리 운명적이지도, 꺼내어 놓고 자주 읽어보지도 않는 책이다. 읽은 지 10여 년이나 지나서 줄거리나 주인공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무턱대고 아무 장이나 열어 읽어본 들 모든 것이 생소할 뿐이다. 낯익은 부분도, 깊은 감동을 주는 부분도 찾을 수 없다. 가끔 누군가가 인용해 놓은 '봄날의 아기곰처럼 네가 좋아' 같은 구절을 볼 때면, 그게 그 책에서 봤던 건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낯설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건, 이를테면 사춘기와도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무언가 지독한 성장통을 겪고 난 후, 문득 그 이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해진다. 뭐랄까, 나와, 세상 사이에 큰 간격이 있고, 내가 그것을 못견뎌할 때마다 체념과 유머를 섞어서 가르치는 불량한 과외선생 같다고나 할까.
우리가 하루키로부터 받은 것은 어쩌면 그의 포즈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세상을 대하는 어른의 방식이라고, 어릴 때의 나는 믿고 싶었었나 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썩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지만, 도리가 없는 것보다야 그런 쿨함과 함께 성장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가끔 책장을 훑어보다 <상실의 시대>를 만나면, 어른의 세계로 가기 위해 내가 받아들인 것이 고요하고 낡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만 같아, 훌쩍 커버린 내가 민망해지곤 한다. 그럴 때는 그 옛날의 순정한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