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 아이 넷을 낳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던 적이 있었다. 아이낳고 기르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모르던 철없던 시절 얘기다. 직장생활까지 하면서 그러고 살겠다는 거였으니 뭘 몰라도 한참 몰랐지... 그러나, 나는 그 시절 내 꿈이 지나치거나 건방진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박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시골 촌부들도 쉽게 누리는 행복이니, 나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해리엇'도 나하고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 꿈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아이를 줄줄이 넷을 낳았고, 그녀의 집에선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헤리엇의 친구,친지들은 그녀의 가정에서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다섯째 아이가 태어난 전까지의 일이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중편 정도 길이의 이 소설은 무섭게 읽힌다. 재미가 있어서 무섭게 읽힌다기 보다는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한 가정이 가파르게 망가져가는 속도감이 너무 아찔해서 무섭게 읽히는 거다. 작가가, 빙하기의 유전자가 현재의 인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글을 읽고 창조해냈다는 다섯째 아이 '벤'. 벤은 초현실적인 존재를 연상시키지만, 그 아이로 인해 망가져가는 한 가정의 모습은 섬뜩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우리 가정의 모습 그대로이다. 마치 내 가정이 무너져가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그때문인 것이다.
'헤리엇'과 같은 절박함으로 나는 도리스 레싱에게 묻는다. 우리가 뭘 잘못한거지? 아이들 낳아 오손도손 잘 살아 보겠다는 것도 잘못인가? 세상을 다 갖겠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정도가 오만한 꿈인가?
그리고, 나는 도리스 레싱의 목소리를 듣는다. 네 꿈도 오만한 것일 수 있다고. 네가 꿈꾸는 행복이 네가 믿는 얄박한 가치들과 이해가능한 것들의 위태로운 집합이라면, 그건 무엇보다도 오만한 꿈이라고.
아마도 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상징물일 것이다. 의사들조차 벤을 어떻게 규정할 지 모른다. 차라리 이해할 수 있는 병명을 가진 장애아라면 헤리엇의 가정이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 속에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헤리엇의 조카가 간간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도리스 레싱이 의식적으로 등장시킨 것 같다. 헤리엇네는 장애아를 내칠 정도로 윤리의식이 희박한 이들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인정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버텨내지 못하는 행복이란... 얼마나 부실하고 허약한 것일까.
사실, 이 책은 둘째 아이의 임신을 알기 직전에 읽은 소설이다. 이 소설이 비정상적인 아이의 탄생을 다루는 소설이란 점을 생각하면, '다섯째 아이'를 떠올리는 건 불경스럽고도 재수없는 상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쩌면 건전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네 가족의 허약 체질부터 개선하라는 경고. 가족 구성원이 하나 더 늘어남과 동시에, 가족의 행복을 지켜내겠다는 나의 집념은 더욱 강해질지도 모른다. 그 집념만큼, 내 마음 한편에선 내 가족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적대감도 자라날지 모르겠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그 모두를 경계하는 마음들. 이 소설은 지금 내게 그 옹졸하고 허술한 행복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물론 단편적인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쓰여진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가족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넘어 존재론적인 부분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 엄마인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는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읽었다. 그리고, 또다른 오만한 꿈을 꾸어본다. '다섯째 아이'의 등장 정도로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가정, 편협하지 않은 가치관으로 이루어진 한 가정의 이상적인 모습을.
(2004년에 적었던 글입니다. 도리스 레싱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