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우에도 마음속에 자욱한 어두운 호의의 안개를 뚫고 이따금 신성한 직관이 솟구쳐 천상의 빛으로 마음의 안개를 태워 버릴 때가 있다. 그것을 신께 감사드린다. 만인이 의심하고 다수가 부정하지만, 그런 의심이나 부정과 더불어 직관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 그리고 천상의 어떤 것에 대한 직관, 이 두 가지를 겸비하며 신자도 불신자도 되지 않으며, 다만 공정한 눈으로 양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 P60
그런데 뱃전 너머를 굽어보니 수면 위에 펼쳐진 이 놀라운 세계 밑에는 훨씬 기이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물로 이루어진 그들의 천장에는 젖먹이를 키우는 어미 고래들, 그리고 어마어마한 몸 둘레로 볼 때 조만간 어미가 될 것들이 매달려 있었다. 이 호수는, 앞서 말했다시피, 상당한 깊이까지 대단히 투명했다. 인간의 젖먹이들은 젖을 빠는 동안 차분한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하고는 마치 동시에 두 삶을 살기라도 하는 듯이 이 세상의 영양을 섭취하면서 정신적으로는 딴 세상의 기억을 맘껏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 고래들도 우리를 올려다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는 보는 건 아니었는데, 갓 태어난 녀석을 눈에는 우리가 한낱 모자반 정도로 비치는 듯했다. - P68
콜럼버스가 왕과 왕비를 위해 푯대 대신 에스파냐 국기를 꽂았던 1492년의 아메리카는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었나? 폴란드는 러시아 차르에게 무엇이었나? 그리스는 터키에게 무엇이었나? 인도는 영국에게 무엇이었나? 멕시코는 결국 미합중국에게 무엇이 될까? 전부 놓친 고래다. - P73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자유는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생각과 사상은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들이 지닌 신앙의 원칙이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 커다란 지구 자체가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그대 또한 놓친 고래이자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P73
영원토록 경뇌유를 짤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오래 반복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경우에도 결국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환상을 낮추거나 최소한 변경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행복은 지성이나 공상이 아닌 아내와 사랑, 침대, 식탁, 안장과 난롯가, 시골 같은 곳에 놓아야 한다. 나는 이제 이런 것들을 모두 깨달았기 때문에 기름통을 영원토록 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밤에 그리는 환상의 상념 속에서 나는 줄지어 선 천사들이 저마다 경뇌유통에 손을 담그고 있는 천국을 봤다. - P85
그런 그의 이름을 딴 배는 명성에 걸맞게 속도가 매우 빨랐으며 모든 면에서 우수한 선박이었다. 나는 언젠가 파타고니아 앞바다에서 한밤중에 그 배에 올라 앞 갑판에서 플립을 마신 적이 있다. 근사한 상호방문이었고, 선원들도 전부 멋지 사내들이었다. 짧고 굵게 살다가 유쾌하게 죽음을 맞는 그런 사람들. 에이해브 영감이 고래 뼈 다리로 그 배의 갑판을 딛고 나서 한참, 아주 한참 후였는데, 그때의 멋진 상호방문을 생각하면 색슨족답게 당당하고 진심 어린 환대가 떠오른다. - P102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개채로서의 고래는 죽을지언정 종으로서의 고래는 불멸의 존재라고 여겨진다. 고래는 대륙이 물 위로 떠오르기 전부터 바다를 헤엄쳤고, 튀일리 궁정과 윈저 성과 크렘린 궁전이 있는 곳 위를 헤엄치기도 했다. 노아의 홍수 대도 고래는 방주 따위를 거들더보지도 않았다. 설사 세상의 쥐를 모두 잡아 없애기 위해 다시 한 번 대홍수가 몰아쳐 온 세상이 네덜란드처럼 물에 잠기더라도, 불멸의 고래는 살아남아 적도를 휩쓰는 높은 물마루 위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모란 듯이 물기둥을 뿜어 올릴 것이다. - P113
지상 최고의 행복이라도 그 속에는 무의미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도사리고 있지만, 모든 슬픔의 밑바닥에는 신비로은 의미가 숨었으며 어떤 사람은 대천사 같은 장엄함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 P114
순간 항해사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뺨에서도 불길이 일어, 그를 겨눈 총구가 실제로 불을 뿜은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간신히 차분하게 몸을 돌려 선실을 나가려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선장님은 저를 모욕한 게 아니라 화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스타벅을 경계하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를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영감.> - P122
에이해브도 자신의 배에서 뒤쪽 갑판에 서 있었지만, 그의 텁수룩하고 검은 얼굴에는 완강한 침울함이 어렸다. 한쪽은 지나간 일로 기쁨에 넘치고 또 한쪽은 닥쳐올 일 때문에 불길한 두 배가 서로 교차할 때, 두 선장도 배의 풍경만큼이나 뚜렷한 대조를 온몸으로 나타냈다. - P133
작살이 뱀의 혓바닥처럼 조용히 타오를 때 스타벅이 에이해브의 팔을 움켜잡았다. <신이, 신께서 당신에게 등을 돌린 겁니다, 선장. 그만둬요! 이 향해는 불길해요. 시작부터 불길했고, 줄곧 불길했다고요. 지금이라도 활대를 직각으로 세우고 이 바람을 고향으로 가는 순풍으로 삼아 이제부터라도 좀 더 나은 항해를 합시다.>- P142
그러는 동안 스타벅은 속마음이야 어땠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아무 말 없이 필요한 명령만을 조용히 하달했다. 그런가 하면 스터브와 플래스크, 이때쯤에는 스타벅의 심정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것 같았던 두 사람 역시 툴툴대지 않고 명령을 따랐다. 선원들 가운데 일부는 낮게 구시렁거리기도 했지만, 그들은 운명의 여신보다 에이해브를 더 두려워했다. - P149
<저기 미치광이 둘이 가네.> 맨 섬 영감이 중얼거렸다. <하나는 강해서 미치고 하나는 약해서 미치고.- P151
<관으로 부표를 만든다고!> 스타벅이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조금 기이하네요.> 스터브가 말했다.
<좋은 부표가 될 거예요. 목수가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플래스크가 말했다.
<가져와 봐. 달리 쓸 만한 게 없으니.> - P153
그들은 서른 명이 아닌 한 사람이었다. 비록 온갖 대조적이 것들, 참나무와 단풍나무와 소나무, 쇠와 역청과 삼베가 한데 모여 있어도 그 모든 것이 합쳐져 하나의 단단한 선체를 형성하고 중앙의 긴 용골이 균형을 잡고 방향을 잡아서 나아가는 것처럼, 배 한 척이 그들 모두를 태운 것과 같았다. 그렇듯이, 선원들의 다양한 개성, 이 사람의 용기와 저 사람의 두려움, 죄와 벌,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되었고, 그들의 주인이자 용골인 에이해브가 가리키는 숙명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갔다. - P172
<어떤 자는 썰물에 죽고, 어떤 자는 얕은 물에서 죽고, 어떤 자는 만조에 죽지. 그리고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로 일어선 파도 같은 심정일세, 스타벅. 나는 늙었어. 자, 악수를 하세.>
그들은 손을 맞잡고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스타벅의 눈물은 두 사람의 시선을 붙여 놓는 아교였다.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고결한 자여, 가지 마세요. 가지 마십시오! 용감한 사나이가 이렇게 울지 않습니까. 이렇게 설득하는 심정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시겠습니까!>- P178
다구와 퀴퀘그가 부서진 판자를 막는 동안 고래는 저만치 멀어졌다가 방향을 틀어서 한쪽 옆구리를 완전히 내보이며 보트를 향해 다시 돌진했는데,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고래 등에 단단히 감겨, 밤새도록 고래가 몸을 뒤틀 대마다 점점 얽혀 든 밧줄에 반쯤 찢겨져 나간 배화교도의 몸이 묶여 있었다. 검은담비 가죽으로 만든 그의 옷은 누더기가 되었고, 팽창한 동공이 에이해브를 똑바로 향했다. - P178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셋째 날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단념할 수 있어요! 보세요! 모비 딕은 선장님을 노리는 게 아니에요. 미친 듯이 놈을 노린 건 선장님, 당신이라고요!> - P179
보트의 선원들은 어리둥절해서 일순 목석처럼 서 있다가 뒤를 돌아봤다.
<배가? 오, 하느님, 배가 어디로 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하고 몽롱한 물안개 사이로 덧없는 신기루처럼 비스듬히 사라지는 배의 환영이 보였다. 물 밖으로 나와 있는 건 가장 높은 돛대뿐이었다. - P182
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