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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의심하다니, 내 마음을 몰라주는 연인이여!
그대에게 아낌없이 바친
사랑 중 일부만 신께 바쳤어도 -
신이 만족했을 텐데요 -
영원히, 내 전부를 드렸는데 -
여인이 더 이상 무엇을 드릴 수 있을지,
얼른 말해 주세요. 그대에게
마지막 기쁨까지 다 바쳐도 된다고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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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 영혼일 수 없어요 -
예전에 그대의 것이었으니까 -
나 그대에게 모두 바쳤어요 -
초라한 처녀인 내가
무슨 재산이 더 있었겠으며,
그대와 조용히 사는 것뿐이었어요!│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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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이 끝나면 다른 물건들처럼,
서랍 속에 보관한다 -
결국 조상의 옷처럼
사랑도 골동품이 된다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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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 태어나기 전 -
죽은 다음에 - 오는 것 -
창조의 순간,
숨결 속에 있던 것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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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디킨슨시선집 #에밀리디킨슨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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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문학이라는 과목(특히 소설)을 너무나 좋아했다. 문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치는 일 자체에 존경심이 끓어 담당 선생님도 좋은 마음으로 따랐다. 시험기간에 돌입해 수행평가로 ‘시 짓기’를 하게 됐다. 모방해도 좋으니 기존 시를 참고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시를 쓰지 못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 쓰지 못했다. 운문은 산문과 다르게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영 어렵기만 했다. 마감일에 겨우 기존 시 하나를 베끼다시피(단어 몇 개만 바꿔서) 적어 제출했다. 그리고 며칠 후, 생각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았다. 문학 선생님은 가장 좋은 시를 제출한 학생을 호명해 읽게 했다. 나와 시선이 얽힌 후, 웃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 기존 시 단어만 몇 개 바꾼 친구도 있어서 읽는데 몹시 불쾌했어요…” 여선생님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그 후, 시를 멀리했다. 시집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세계에 거부당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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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를 읽는 일은 없었다. 어쩌다 놀러 간 서울 지하철역에 붙은 시를 봐도 읽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더 흘러 사랑하는 이를 만났고, 느낀 감정을 운문 형태를 빌려 조심스럽게 적어 봤다. 시를 향한 거부감이 서서히 옅어져 갔다. 지금도 많은 시도 중이다. 시를 읽고, 운문 형태의 글을 쓰기도 하고. 이렇게 제대로 된 시집을 읽는 건 두 번째다.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시집을 읽고, 시는 어렵기만 한 게 아니구나, 많지 않은 글자로 가슴을 울릴 수도 있구나, 시에 대한 거부감이 완전히 녹아내리기도 했다(「내가 너를」이란 시를 가장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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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먼 타지에 시간 속에 존재하던 시를 만났다. 관습을 벗어난 독특한 리듬과 구두법을 사용해 아주 독창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시를. 단절의 여러 측면을 다루고 있어 특별하면서도 어렵게 다가왔다(아직은 시를 잘 몰라서). 정해진 시각을 초월해 쓰여진 시라 그런지 이해에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고 느껴졌다. 이런 독특하고 특별한 시를 쓴 시인이 있었다. 그는 묘비에 새긴 문자처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몇 번이고 ‘다시 소환되’고 있다. 150여 년 전, 외부와 차단된 채(30년 동안 병간호한 어머니가 돌아가셔 장례식을 치르는데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창밖으로 지켜봤다고) 가장 생명력 있게 집필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 사후, 여동생 라비니아가 발견한 1800여 편의 시가 토머스 H. 존슨에 의해 원문과 가장 흡사한 형태로 출간된다. 1955년에 출간된 시 전집을 토대로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이 만들어진다.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게 된다. 몇 세기를 뛰어넘은 지금,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어느 때고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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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에서든 시에 대한 거부감이 큰 사람이나 시는 고상한 사람들이 읽는 거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에게 유의미한 손길로 권하고 싶다. 어려워도 한 번 읽기에 도전해 보시라고.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인다. 어떤 시를 읽든 그의 목소리가 함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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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에 협조해 주신 내 사랑 빛과 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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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eulyoo)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