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정념노트

 



아직 가을은 아니다. 가을이 오려면 아직 조금 더 남아있는데 자꾸 가을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까닭은 이른 새벽과 초저녁부터 부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짐승처럼 그르렁거리게 되는 저절로. 옥시토신 덩어리게 불과한. 태어나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지만 그러니까 그저 덩치 큰 옥시토신 덩어리에 불과한 게 요구하는 바가 많구나, 그런 뜻으로 그는 말했던 건가 싶기도 하다. 몸은 가을인가 분명 아직 여름인데 왜 자꾸 가을이 되면 달라지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이상하네_라고 반응을 하고 그렇다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잘 읽게 되는 그 루틴이 다시 시작되는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그 삶의 방식이 가을, 삐용삐용 아직 가을은 아니지만 곧 가을이 다가오니 삐용삐용 이제 가을맞이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삐용삐용 뇌에서 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가을이 오면 많이 먹고 읽고 잘 잤다. 조금 더 기억해봐, 그러니까 교복을 입기 시작하던 때, 그렇다면 중학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한창 못생기기 시작한 나의 사춘기 타이밍.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지고. 하늘은 높아지고 말은 배불리 먹고 그러하니 좀 느긋해지도록 하자, 라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품지 않아도 좋구나, 룰루룰루, 이런 마음이 저절로 만들어져 빙긋거리며 자주 웃게 되는. 그러니까 가을이 오면 조금 넉넉해지기 마련이다.

친구 생일을 맞아 만났는데 생일선물은 건네지도 않았다. 가을이 되어 만나요, 라는 말만 달랑 해놓고. 인간을 사랑하고 더불어 함께 포옹하고 살결을 쓰다듬으면서 눈을 마주한다는 건 대체 뭘까. 함께 섹스를 할 수는 없지만 섹스에 대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귀하다는 사실을 오늘 다시 알았고.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불륜과 결혼과 이혼과 재혼과 또 다시 이혼과 삼혼에 대해서 농담 섞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 이야기를 오랜만에 하면서도 어느 정도로 그를 마음에 담아두었는지 스스로 알았다. 때로는 이게 집착인가? 사랑인가? 그냥 몸정인가? 알 수 없어 헷갈릴 때 있었으나 그게 무엇이든지 그 시간과 그 사람이 그때의 내게 필요한 건 맞았으니까 별다른 불만 없이 받아들인다. 물론 시간이 이렇게 흘러 가능한 일이겠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언젠가 아마도 작년 가을쯤이었던 것도 같고 용하다는 곳이 있어서 사주를 보러 갔을 때 본인이 삼혼을 해야 하는 건 알죠? 라고 해서 그럴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삶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다고 답했다. 쿨해서 좋네, 라고 했고 쿨해서 싫다는 놈들도 많아요, 라고 말하니 크득거리며 웃었다. 1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하는, 평소에 거의 입을 대지 않는 탄산을 엄청 마셨고 거기에다 맥주도 마시는 바람에 운동은 쉬기로 했다. 밥이 이슈래 밥이, 라고 친구는 진지하게 걱정했고 밥은 그 후야! 뉴욕이 먼저고 밥은 그 후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정말로 뉴욕에 있는 남자가 실제 인물로 다가왔다. 그냥 저쪽 세상에 살고 있는 셀로판지 인형처럼 무게감이 가벼웠는데 어쩌면 그러할 수도, 라는 느낌이 왔다. 어제는 새벽에 한 번만 일어나서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눈은 뻑뻑했고 목은 금세 타들어갔다. 어제 수련을 하는 동안 과한 후굴을 하는 바람에 엉덩이 근육이 딴딴해져서 계단을 올라갈 때 힘들어했다. 만져줄 수는 없지만 뚜드려줄 수는 있어, 라면서 친구가 엉덩이를 콩콩콩 두드려줬다. 29금 드립을 날릴까 하다가 참고서 후후후 웃었다.

올해 남은 시간과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헤아리며 할 일들과 하고픈 일들 이야기를 했다. 정말 뉴욕에서 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내 곁에 서 있을 사람이로구나 알았다. 친구와 결혼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내 들러리로 내 옆에 서있을. 친구가 사진을 찍어주었다. 돼지잖아! 다이어트할 거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럴 때 언제나 딸아이가 이야기하는 바, 돼지처럼 나온 게 아니라 돼지가 되어서 돼지처럼 나오는 거야,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라고. 옛날 애인이 다른 저자들과 함께 알라딘에서 북펀딩을 한다고 하더라, 했더니 친구가 웃긴 소리로 피드백을 했다. 오랜만에 마음이 따땃해져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귀에서는 Beck이 흘러 들어오고 늦여름 저녁 공기는 아직 뜨끈뜨끈하기만 했다. 그렇게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거, 이것도 이미 본인이 알고 있는 거 알죠? 눈을 말똥말똥 뜨면서 알지만 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아요, 비탄 어린 절망에 하염없이 베개를 눈물로 적시는 일 같은 거 일생에 한 번이면 족한데, 이번에 또 겪고 아 정말 이런 일 그만 하고 싶다 싶어요, 라고 명리학 서적이 그득한 책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분간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두 발 뻗고 편히 자요. 라고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정말 고생 많이 했으니까 당분간 그런 마음 고생할 일 없으니. 그때는 나도 모르게 아휴, 정말 고마운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고 두 손 모아 진심으로 인사했다. 불행을 원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해탈을 원한다는 건 결국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고통을 끝내고자 해탈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오랜만에 읽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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