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이즈음을 떠올려보니 그때는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헤아려야 하는지를 생각하느라 유독 더 혼자 시간을 많이 가졌다. 굳이 책을 읽고 싶지도 않았다. 책을 읽는 척 폼을 재지도 않았다. 가만히 커피잔을 들여다보면서 커피를 홀짝이면서 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홀로 재단했다. 재작년 일기를 다시 펼쳐보니 아 그랬군 진짜로. 성인이 된 이래로 최저 몸무게를 찍었고 가벼우면서도 숨쉬기가 많이 힘들어서 헉헉거리기 일쑤였다.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확고하게 다져졌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살과 더불어 근육이 조금 많이 붙었다. 싫어서 거리낌이 있는 경우에는 거절의 뜻을 혐오감 없이 잘 표현하게 되었다. 좋아하면 미친듯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드러내는 애정 표현은 조금 덜해졌다. 덜해졌다고 믿지만 아닌가 보다. 좋으면 좋아서 애기처럼 얼굴에 몸짓에 다 드러나는데 무슨 그런 망발을, 이란 말을 들었다. 조금 더 숨쉬기가 수월해졌고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시간이 홀로 있는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니 2년 전과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덩달아 인간관계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직간접으로 체험하며 느끼며 인간 존재에 대해서 더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니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문요한의 [관계를 읽는 시간]을 읽다. 결국 인간은 이 지상계에서 살아가기 마련인지라 천상계나 지하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한 이들을 만나면 숨이 저절로 컥컥 막혀올 때 있기 마련이고 최근에 이런 경험 몇 번 하고나니 내 입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란 그게 그 사람의 카르마려니 혹은 내 카르마려니 이 말이나 우리는 천상계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지상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하계도 아니고. 우주의 흐름을 믿고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고 있다. 싫어하는 사람들 왜 그토록 싫은지 좋아하는 이들은 왜 좋아하는지 까닭을 헤아릴 수 있어서 좋은 읽기였다. 읽고난 후 방어형과 회피형 사이에서 더 수많은 캐릭터들을 만들 수 있어 이게 최고의 수확이 아닌가 싶다. 지상계에 존재하는 인간들이라고 했으나 인간 안에 신과 인간 안에 짐승이 존재함을 다시 알 수 있는 기회들. 고로 천사 같은 사람도 어떤 관계에서는 짐승이 되고 짐승 같은 사람도 어떤 관계에서는 천상의 존재가 된다는 이 신비한 인간(관계)세계 되시겠다. 인간의 몸을 하고 인간의 마음을 하고 짐승이 되었다가 인간이 되었다가 천상의 존재가 되는 그런 삼종변신을 허락하신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싶은 이해심이 지금은 그래도 아주 조금 생겼다. 분노와 욕설과 혐오감으로 팽팽하게 날을 세우던 2년 전에 비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바 그 바운더리와 또다른 의미의 바운더리의 증요성을 다시 체감할 수 있는 읽는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