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밑줄. 방학인데 내내 놀기만 한다고 동생이 조카에게 소리 지르는 걸 들으면서 우리도 방학 동안 내내 놀기만 했잖아, 라고 하니까 우린 놀기만 하지 않았어! 책도 읽었다고! 라고 대꾸하는 걸 들으면서 빙그레. 아저씨 셋이 들어와 영화와 연기와 배우들 이야기를 주식 이야기 틈바구니 사이로 하는 걸 엿듣고 있다. 모두 다 평론가처럼 말하네! 미모가 대단하다는 이십대 여성 살인자 이야기도. 시끄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불편하지도 않은 걸 보니 무의미한 배경음악과 다를 바 없는. 내가 왜 너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거니? 라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딸아이가 라이프라는 건 C, B와 D 사이에 있는. 이라고 해서 초이스, 벌스, 그리고 데쓰.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어떤 선택들과 선택들이 하나씩 겹쳐지고 쌓이다가 순간 또 확 허물어져버리는. 내가 너를 선택한 건가? 네가 나를 선택한 건가? 어쩔 수 없는 선택들도 온전하게 책임을 지려고 한다면 그것도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채찍을 들고 바닥을 날카롭게 치고픈 충동이야 있지만 그래도 이성을 가진 인간이니 하고 심호흡을 한다.
세 사람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한 액자 속에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알아버림. 힌트를 발견했다. 한 뿌리를 지니고 있되 가지마다 뻗어 자라는 꽃송이는 모두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세 꽃송이에만 방점을 두고 있다가 한 뿌리라는 걸 알았고 거기에 포인트를 두면 다른 장면들이 쏟아져 나온다. 심리적인 면모에만 초점을 두어도 괜찮겠다. 동일한 시간,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제각각 다른 생각들을 하면서 끝없이 풍경들이 펼쳐지고. 우연히 동일한 시간, 다른 공간 안에서 각자 동일한 행위들을 하면서 펼쳐지는 다른 생각들도.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나이든 여성 노숙자가 짐으로 가득 들어찬 이마트 장바구니 두 개를 낑낑거리면서 든 채로 환한 빛이 쏟아지는 음식점 안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풍경과 마주했다. 아이리스 머독 이름이 보여서 어떤 책일지 궁금해서 충동적으로 구입.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으나 현재 쓰고 있다는 논문의 개요는 좀 관심이 간다. 사장님이 드립을 새로 내려 서비스로 주시면서 곧 봄이 오겠네요, 하셨다. 건조하고 메마른 손이 두 발목을 쥐는 손간 봄이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라는 문장이 찰나 머릿속에서 두둥실 떠올랐다.
추하고 고통스럽고 천한 걸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며 두 팔 벌려 반길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추하고 고통스럽고 천한 짓을 극히 자연스럽게 하는 이들조차 그러하지 않을까. 동생과 대화 나누던 중.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으니까. 인간의 탈을 쓰고서 해야할 짓과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다는 것 정도는 굳이 부모가 아니어도 학교라는 제도권 안에서 어떤 가르침들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알 수 있는 것들이니까. 스스로 얼굴을 붉히는 짓을 하고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는 있어도. 카프카의 글을 읽는데 이십대 초반에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다. 경험의 폭이 시간과 더불어 넓어진 거야 당연한 거지만 그때는 또 그때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했던 것도 같다. 심장의 형태가 단 하나뿐일 거라고 여겼던 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이들과 어떤 사랑을 주고받느냐에 따라서 그 심장의 형태와 빛의 세기와 컬러가 모두 다 달라진다는 걸_

1. 나는 나중에 (21장) 내적 심연이라는 이미지가 우리가 결코 완전히 소모할 수 없을 만큼 무진장한 영역을 나타내는 자아 탐구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음을 논하고 싶다. 이 용어는 낭만주의 시대 이전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몽테뉴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세밀함에 대해 예리한 감각을 지닌 몽테뉴는 때때로 헤르더와 훔볼트의 동시대인인 것처럼 보인다. [몽테뉴 수상록], 제2권, 6, P. 399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정신같이 잘 헤매는 움직임을 좇으며 우리 내심의 주름살의 불투명함 속에 침투해서 그 요동하는 수많은 세밀한 모습을 하나씩 포착해보려는 기도는 생각보다는 훨씬 힘든 가시밭길이다." - P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