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이미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영화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이 재밌을 거 같아서 읽게 되었다. 재밌다는 느낌이 문학적으로 만족스러워서 재밌는 게 아니라 진짜 웃겨서 재밌을 것이라 예상했다는 말이다. “왕을 위한 홀로그램” 이라니, 어쩐지 좀 코믹한 상황이 펼쳐질 거라는 느낌이 오지 않나? 나만 그런가?
하지만 읽어보니 내 예상은 빗나갔고 오히려 우울하고 가라앉는 분위기가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는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 가야할 목적지를 모른 채 서 있는 사람의 막막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앨런 클레이는 54세의 중년 남성이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출장을 와 있다. 홍해 연안 사막에 새로 만들고 있는 계획도시인 킹 압둘라 경제도시(KAEC)에 IT 시스템을 팔려는 미국 기업 릴라이언트를 위해 일하고 있는 중이다. 20대의 IT 기술자 셋과 함께 이 도시에 왔지만 최신 기술에 대해 문외한인 앨런은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 한다. 젊은 직원들도 세대가 다른 앨런에게 딱히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여기 오기 전 앨런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부인과는 오래전에 이혼을 했고 딸은 좋은 대학에 다니지만 어마어마하게 비싼 학비를 내야하는데 앨런은 그 돈을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집을 내놓은 상태다. 몇 년 전 소규모 자전거 제작 공장을 만들어 볼까 하다가 여기저기서 빚을 지게 되었는데 갚을 능력은 없어서 소송에 걸릴 위기다.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컨설팅 일을 하고는 있었는데 요 몇 년간은 찾는 사람이 없어서 TV 스포츠 중계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앨런은 이 계약만 성사시키면 많은 커미션을 받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의 안 좋은 상황이 한방에 정리될 것이었다.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는 사우디 왕한테 홀로그램 시연을 해야 하지만 왕은 언제 올지 일정을 알려주지 않고, 앨런과 젊은 직원들은 사막의 텐트 속에서 왕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왕을 기다리면서 앨런은 호텔이 있는 도시와 KAEC를 왔다갔다하며 사색에 잠겨 살아온 날들을 회상한다.
그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는 미국의 자전거 제조 회사 슈윈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임원으로 승진했다. 그때가 그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미국의 제조업은 슬슬 더 싼 노동력이 있는 나라로 공장을 옮겨가고 있었다. 슈윈 또한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래서 앨런은 노조를 파괴하고 공장을 헝가리, 대만, 중국으로 옮기는 일에 손을 거들었다. 결과적으로 슈윈을 파산하게 하고 고용된 노동자들의 삶을 망친 일에 기여한 꼴이었다.
이제 더 이상 미국에선 자전거를 만들지 않는다. 어디 자전거뿐인가? 미국의 공장들은 앨런 같은 사람들의 노고를 거쳐서 해외로 옮겨가 버렸고 현재 미국의 제조업은 무너졌다. 새로운 세계 무역센터 건물에 들어갈 유리마저 중국에서 만들다니 말 다 했지. 그런 일에 일조한 앨런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와 같은 관리자들, 그 일에 힘을 쏟아 붓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의 결정은 근시안적이었다. 동료들의 결정도 근시안적이었다. 그 결정들은 어리석고 편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신의 결정이 근시안적이거나 어리석거나 편의적인지 몰랐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장차 자신들을, 앨런을 지금 같은 꼴로 만들게 될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 앨런은 거의 파산 상태에 실업자와 다를 바 없었으며 집을 사무실 삼아 운영하는 1인 컨설팅 회사의 사장이었다. (10-11 쪽)
앨런은 어떻게 보면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성실하게 일을 하며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려고 했을 뿐인데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 실제 물건을 팔러 다니던 영업 사원이었던 앨런은 제조업이 무너져 버린 현재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은 어쩌면 바로 자신이다. 그가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일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왕을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면서 앨런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 홀로그램이라는 그가 알지 못 하는 기술을 팔러 온 지금, 무능한 늙은 꼰대 취급을 받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쓸쓸하다.
혼자서 사막의 폐허 같은 건설 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자신의 집 돌담을 쌓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던 미국에서의 삶을 떠올린다. 미국은 아주 사소한 것조차 만들어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은유일 것이다. 미국은 이제 실체 없는 홀로그램 같은 것이나 만드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현실에선 앨런은 무능력자다. 가끔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아직은 힘이 있다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두 여성과의 만남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이 드러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든 유일한 친구의 집에 가서는 이리 사냥이라는 아찔한 실수로 관계를 망쳐버린다.
그러면 앨런의 마지막 희망인 왕을 위한 홀로그램은 어떻게 될까? 그는 과연 계약을 따낼 수 있을까? 홀로그램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다. 실체가 없는... 잡을 수 없는...더 이상 실제 물건을 만들어내지 않는 미국. 홀로그램은 어쩌면 미국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기다리던 왕은 홀로그램 시연을 무표정하게 관람하고 계약은 중국 업체와 해버린다.
앨런은 사막 한가운데에 허무하게 남겨진다. 뜨거운 곳에서 이토록 싸늘한 결말이라니...
2012년에 나온 소설로 영화는 2016년에 나왔고 우리나라에서 2018년에 번역서가 나왔다. 그동안 모르고 있던 소설이었는데 어쩌다 우연하게 읽게 되었다. 늦게나마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참 괜찮게 읽었다.
일단 이 소설의 배경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킹 압둘라 경제도시라는 곳이 매우 생소했다. 사막에서 도시가 막 지어지고 있는 초기의 모습을 공허하고 쓸쓸한 문장으로 읽는 느낌이 좋았다. 그 배경에 미국 제조업의 몰락이라는 주제를 얹어 놓으니 소설은 말할 수 없이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색적이기도 하고 조용히 침잠하는 느낌도 들면서 약간 묘했다. 그래서 그런지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빨랐다. 분위기에 취해 집중하며 읽었다는 소리다.
작가의 다른 번역서도 찾아보다가 데뷔작이라는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 아픈 이야기”도 사놓았다. 오랜만에 좋은 작가를 만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