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흡을 짧게 해도 읽히는 토막글들에 대한 독서일기를 이 카테고리에 담는다. 호흡의 길이가 공부의 깊이를 늘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므로 이 카테고리는 정당하다. <노마디즘>의 저자에게 날을 세운 <천 개의 고원> 번역자의 글이 그 첫 출발이다.
1
들뢰즈 번역 출판의 선편을 쥔 김재인이 근래에 비판의 칼날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그 상대는, 들뢰즈 사상 전반에 대한 해설서인 <노마디즘>의 저자 이진경이다. 아래 인용부분은 알라딘 리뷰에 김재인이 남긴 토막글의 일부다. 그것에는 <문학동네>에 실린 "<천 개의 고원>이 <노머디즘>에게"라는 긴 비판문의 핵이 담겨 있다.
"<천 개의 고원> 역자로서 한 마디 붙입니다. (...) 제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노마디즘>이 제가 번역한 <천 개의 고원>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책 도처에서 저의 번역을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응답하지 않으면, 인정하는 꼴이 되버리지 않겠습니까? (...) 이진경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위와 같은 발언을 통해 들뢰즈의 사상을 뒤틀고 있습니다. 이진경 씨의 주장과 들뢰즈 자신의 발언은 명백히, 뿌리부터 어긋납니다. 문제는 이런 오류가 <노마디즘>에서 주요 개념 거의 전부에 걸쳐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개념 번역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부분적인 잘못이야 누구나 범하는 일이니까요), 개념 이해와 설명에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지면 관계상, 단지 지면 관계상, 다른 오류를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오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반 독자들은 어쩌란 말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냥 이게 한국 학계의 현주소라고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런 상호 검증도 없고, 상호 검증할 만한 사람들도 없고(...) 끝으로 <노마디즘>에 대한, <천 개의 고원> 번역자로서의 소감을 구호로 정리하겠습니다. "긴장도가 한없이 떨어지는 책, 끊임없는 오해로 중첩된 책, 그래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책!"
그의 자기중심성은 꽤나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역자의 신분을 밝히고는 알라딘 리뷰에다 급박한 토막글을 올린 것을 통해서, 그의 그 비판적 서평이 일거에 구축된 글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들뢰즈라는 한 걸출한 인물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번역자'로서의 '엄밀성'은 그의 최대 최량의 무기다. 그런 무기가 있음으로 해서 그는 정곡을 비껴난 비아냥이나 거친 숨을 몰아 쉬는 흥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실력이 들통날까 겁내며 권위로 토론의 장을 파괴하거나, 고의로 그 장을 회피하며 고생스런 변명을 일삼는 이들은 김재인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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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은 그러나, 그 같은 김재인의 글에 대해 아무런 답을 하고 있지 않다. 이들 젊은 두 연구자가 동일한 대상을 거점으로 학문적 공방을 치열히 전개한다면, 그 반향의 의미는 작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이진경의 반응은 있어야 한다. 묵묵부답인 것은 김재인에 대한, 그리고 그 둘 함께 존경하는 많은 학인들에 대한 도리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김재인과 마찬가지로, 이진경의 책임있는 자기중심성에서 피어 오를 향내를 다시 한 번 음미하고 싶다.
2
이진경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맑스를 추종해 함몰하지 않고 사유의 동일한 레벨을 지향하며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자 했다. 그 연장선 위에 <노마디즘>도 걸쳐져 있는 듯하다. 들뢰즈에 대한 '번역'이 아닌 '해설'을 내걸었기에, 실상 그 저층에는 들뢰즈의 사유에 대한 대타적 성격으로서의 '어깃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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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의 정치한 번역과 그 원전의 실체적 구현. 이 둘 사이, 가장 들뢰즈적인 것은 무엇인가. 김재인과 이진경을 지반으로 한 이 물음에 대해 깊이 없는 '원전중심' 비판은 이미 무효하다. 위의 물음은 들뢰즈에 제한된 국부적 문제가 아니라, 키드(kid)들을 양산해내는 한국 인문학문 일부 혹은 전부의 뿌리 부재를 재사유하는 문제에 걸리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재사유가 깊어지면 사회 사상 생명 물질에 대한 포괄적 인식론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보다 크고도 근원적인 문제로 된다.
다른 한편, 위의 인용문에서 김재인이 말한 "한국 학계의 현주소"를 타개해 나가는 방법이, 한 외국 철학자에 대한 상호 검증과 해설의 자리를 만드는 것에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부분적인 것에 멈추기 쉽다. 그런 자리를 최저층에서 관류하는 왜곡된 인식론을 문제삼을 때만이 한국의 학문적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타개책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재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함몰된 들뢰지언'이 된 것은 아닌가. 근대 분과 학문의 탄생과 성장에서부터 그것의 해체를 말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통괄해, 그 편향된 지향성의 원인을 '한국 인문학의 서구 컴플렉스'라고 지적하는 이진우의 비판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 인문학이 지나온 투쟁적 정점들의 '과정'과 그 '효용'에 대한 진지한 '답사'는 중요해진다.
'일리(一理)'와 '역안(譯案)'과 '생극(生克)'과 '플레타르키아'와 '흰 그늘'과 '심미적 이성' 등이 밟아나온 길들이 그런 답사의 대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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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과 '서', '고'와 '금'의 우열이 공부자에 의해 판가름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학문적 차원에서 운위되야할 것이지, 유행적 담론들의 말류 감각으로 재단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난해하지 않고 명료한 말들을 대하는 사람들은 보다 쉽게 느낄(感) 수 있고, 그래서 보다 쉽게 움직일(動) 수 있다. 그런 '감동'을 통해 '틀' 자체를 새롭게 곱씹기 위한 단초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0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