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발랄하면서도 빈틈없는 마침표
젼 2004/01/1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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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창작물에 대해 감상이나 리뷰를 쓰는 일은 왜 그리 힘든 일일까. 직업상 리뷰가 숙제가 되는 일이 빈번히 있는데도, 리뷰 쓰는 일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아주 가끔 저절로 자판에 손이 갈 때가 있다. 이 책 <제인 에어 납치사건>을 읽고나서가 그랬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정신없이 독파를 하고 나니, 몇 년 전에 이영수의 <면세구역>을 읽고 느꼈던 감동과 비슷한 감동이 찾아왔다. 요 몇 년 많은 사람들이 재밌다고 하는 책들에 재미를 못 느껴서 그런지, 그 감동은 정말 컸다. 그래, 내 감성이 무뎌진 게 아니었어! 라는 기쁨을 느꼈다고 할까?
<제인 에어 납치사건>의 장르는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추리소설의 성격도 띠면서, SF적인 배경설정에 뱀파이어 소설의 냄새까지 풍긴다. 소위 말하는 퓨전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내 나름대로는 <개는 말할 것도 없고>나 <멋진 징조들>과 같은 계열의 장르짬뽕 따발총 수다집이라고 정의했지만.
<제인 에어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는 세계는 1980년대 영국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 80년대가 아니라, 다른 평행세계 속의 장소다. 그곳은 예술과 작가가 최고 가치로 인정받는 곳이며, 아직도 크림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시간경비대라는 특수요원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주인공 서즈데이 넥스트는 특작망이라는 우리세계의 FBI와 비슷한 곳에 소속한 퇴역군인이다.
자 이제, 이 즐거운 설정 안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제목이 <제인 에어 납치사건>이니 제인 에어가 납치되겠지?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제인 에어가 납치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론 중간 중간 로체스터가 등장하고 소설과 현실이 뒤섞이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곧 납치사건이 벌어질 거라는 분위기는 풍기지만, 정작 제인 에어는 후반부에 가서야 납치된다. 그래선지 중반부까지보다 제인 에어가 등장하는 후반부가 훨씬 박진감 넘치고 즐겁다. 정말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해야 할까. 특히 서즈데이가 책 <제인 에어>속에 들어가 모험(이라기엔 좀 얌전하지만)을 벌이는 부분은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유머들. 소설을 여행하는 패키지여행을 만들어낸 일본인이라든가, 원본이 아닌 인쇄물에 들어간 잭 시트의 시, 중간 중간 뜬금없이 등장하는 시간여행자 서즈데이의 아버지 이야기 등등이 양념 역할을 하며 독자를 즐겁게 한다.
물론 이처럼 가벼우면서도 재기발랄한 책들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즐거운 책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흐지부지한 끝마무리를 보이지 않고,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만족스러운 마침표를 찍는다. 앞으로 재스퍼 포드의 책이 얼마나 더 번역돼 나올지 알 수 없으나, 나온다면 예약해서라도 살 것 같다.
마지막으로 문학과 관련한 인용이나 패러디가 많긴 하지만, 꼭 각주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다. 엄청난 독서가가 아닌 사람도 즐길 수 있다는 부분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한데. 숱하게 달린 각주들이 쉬운 소설을 어렵게 보이게 만든다는 걸 생각하면, 이 책의 각주는 책의 미덕을 실추시키는 대실수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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