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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한 달력을 보니 검게 물든 숫자가 다섯 개, 그나마 하나는 스마트폰에 대한 예행연습 차원이었으니 12월은 도무지 분발을 못한 셈이다. 무기력했던 탓인지 반대로 무력함조차 느끼지 못할만큼 분주했던 탓인지, 아마도 그 양자 사이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사이 어느덧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이웃님의 말씀대로 한 해를 나름 정리해보아야 할텐데, 조급하다.

작년부터가 아니었을까. 크리스마스와 각종 연말회식들, 숱한 만남과 헤어짐들이 만들어내는 소란스러움 때문이라도 연말은 역시 '연말'의 분위기를 연출해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유난스러움조차 의미없는 통과제의처럼, 단지 어쩔 수 없음에 이끌려 지나쳐야만 하는 의무적 행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마치 그런 '고단함'을 통과하지 않고선 새로운 한 해가 영원히 도래하지 않기라도 하듯, 모두가 술과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말들을 토해내며 지나 온 시간에 대한 천도재를 올린다. 그뿐이다. 단지. 성탄절과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되는 흥분과 설렘도, 시끌벅적한 여흥과 살풀이도 모두, 덤덤하게 다가온다. 서글픔이나 후회도 덩달아 줄어든다.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이겠지만 그 또한 나쁘지만 않다. 무뎌지는 세월들 너머로도 새해는 어김없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래, 조급, 하다.

몇 번의 망년회를 겪고도 잊혀지지 않을만큼 2011년의 마지막 한 주, 한 해의 하중이 한 점으로 집중된다. 부득이(?) 집으로 올라온 건 다음날 입을 옷을 챙겨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일 집을 나서면 금요일 밤, 최악의 경우엔 토요일에나 이곳에 있게 된다. 야근을 하지 않고선, 새해 첫 날을 사무실에 홀로앉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자판을 두들기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몇 장의 사진을 몰아찍고 포스팅을 시작하려는 찰나 '나꼼수 특별공지' 다운로드가 완료된다.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린다. 또한 내일은 사무실 대청소로 다소 이른 출근을 해야만 하고...후~~~

 

 

하루종일 끊이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업무에 요상스런 퇴근길.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과 베란다에 널려있는 세탁물들을 처치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쌀을 씻고, 샤워를 하고. 빛(아마 달빛이었나보다)의 속도로 하나들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했음에도 밥을 먹고 모니터 앞에 앉으니 벌써, 열시가 가깝다. 트윗에도 올린 것처럼 적어도 이런 날만큼은 '각시'는 고사하고 '우렁이'라도 한 마리 있었으면 싶다. 아무래도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어디 논두렁에라도 나가 보아야겠다. 우렁이 몇 녀석을 납치해 집으로 데려오려면. 아니, 아니다. 우렁이가 밥과 청소는 해주겠지만 그러고나면 분명, 자기와 놀아달라며 때를 쓸지도 모른다. 돈도 더 벌어오고 그럴러면 야근도 더 해야할지 모른다. 아! 도무지 헤갈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딜레마.

 

 

 

 

백가흠의 『귀뚜라미가 온다』

시차가 느껴졌다. 오히려 『조대리의 트렁크』와 동시에 읽고 있던 『가나』에 눌리는 형국이다. 2005년 7월, 그 시절이라면 인도의 어디메쯤 있었을 때이지만 만약 당시 『귀뚜라미가 온다』를 만났더라면 지금과는 역시, 다르게 느껴졌을 게 틀림없다. '배꽃이 지고'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독자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게 만든다.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가서라도 '과수원집 주인'을 멍석말이를 하고 싶을정도였으니. 하지만 이례적으로(?) 이 책의 압권은 평론가 김형중의 해설이다. 욕망과 폭력이라는 그물로 얽혀있는 소설집이지만 해설을 읽고나서야 그 그물들이 얼마나 촘촘하고 단단히 얽혀 있는지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여직원들에게 요사이, '한강'을 읽으라 자주 권한다. 난, '김연수와 하루키' 못잖게 '한강'을 좋아할 수 있는 여자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자신이 있다. 문제가 없진 않다.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한강'이라 말할 때, '漢江'을 먼저 떠올리고, '한강'을 권하는 이들이라곤 유부녀와 곧 유부녀가 될 분들 뿐이다. 치명적, 사랑은 그녀의 소설로 이미 충분하다.

 

 

 

 

 

 

좀더 나이를 먹는다면 달라질까. 스티븐스의 그 꼿꼿한 명예와 자존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음에도 나에겐 그 나날들 속에서 스티븐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과거의 시간을 길어올려 화려하게 각색하고 자위하는 일밖엔 없을거라 생각이 든다 .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소위 고전이라는 것들을 읽었을 때 느꼈던 분위기를 이 책에서도 받았다. 역시나 스토리는 소설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전부가 될 순 없다.

(하루키는 동시대 일본 작가의 책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알았다. 하지만 동시대 일본인 작가인 '이시구로'는 예외란 사실을. 하루키의 만들어내는 자장은 자연스레 '이시구로'에게까지 인력을 작용시킨다.)

 

 

 

 

문학이 아닌 문학 너머의 사회에 대한 시선들조차 그는 다감하다. 동시에 날카롭다.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재가 있을까 싶을정도다. 신형철은 예리하면서 따듯하다. 정신분석과 철학적, 문학적 이론들로 무장했음에도 평로가이자 한 명의 '독자'로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김현선생이 그렇듯 '평론'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가 '신형철'이 아닐까. 다만, 그의 능력과 글쓰기의 場이, 그의 학벌과 맞물리면서 곱게만 보이지 않는다. '문동'이라는 '메이져'를 벗어나도 그라면,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문동'이 '악'은 아니지만 적어도 '선'은 아니기에.

 

 

정치의 바람이 거세진다. 정봉주 의원의 구속과 선관위 디도스 공격은 태풍의 눈이 되어 바람을 한층 요동치게 만들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읽은 글이고 가장 먼저 옅은 밑줄을 그어 본 문장이다. '태풍의 눈' 속에서 그는 좀더 선명한 모습으로 보일 것도 같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그렇게 살았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단해 그렇게 죽었다. 나는 늘 문학은 천박한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 맞서 숭고한 '몰락'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업이라고 믿어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간 노무현의 몰락이 내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문학적이다." (느낌의 공동체 p185~186)

 

 

자기말한 불쑥 뱉어내고 끝낸다.

이웃님들 관리도 들어가야하는데...

아직, 2011년,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으니까요.

 

                                                (http://redneck96.blog.me/에서 옮겨온 페이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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