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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
  • 정용준
  • 12,600원 (10%700)
  • 2011-11-18
  • : 1,335

지금에서야 서정적·낭만적 언어의 세계(소설) 또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용한 방편이자, 인간적 존재로서 숙명처럼 떠안아야만 하는 고독과 결핍, 욕망 그로인한 관계의 부조리와 폭력 등을, 일상이라는 수면아래 감추어져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 속성들을 인식할 수 있는 길'way'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20대엔 오로지 이성적·과학적 언어만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적 세계라 '오해'했다. 둘은 선후의 관계도 아니요, 가치의 고저로 비교할 수 있는 이분법적 세계도 아닌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병렬적, 상보적 요소일 뿐이다.

 

 

서론이 거창했던 건, 그럼에도 내가 읽는 소설이란 대부분 일차적 검증이 끝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평단과 대중이 갖고 있는 일정한 체를 투과한 책들을 손에 잡았고 나 또한 그 체의 크기만큼의 공감과 감동을 받아왔다. 변명이 없는 건 아니다. 주어진 시간과 자본은 무한하지 않았고 그에 반비례해 읽어야 할 책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실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테다. 문학잡지와 계간지를 읽으며 신예작가들의 작품을, 또는 '기하급수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을 동시간적으로 읽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국인 모두가 김윤식 선생이 될 수는 없다.(그런 세상이 온다면 문학은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김훈과 박민규, 김연수와 김애란, 한강과 백가흠, 오스터와 매카시 등등. 모두가 중간 어느지점에서 만나게 된 연緣들이었고 그 지점으로부터 과거와 현재의 양방향으로 확장된 작가들이다. 그만큼 더디게 시작한, 그리고 소설에 대한 다소의 불신과 주저가 낳은 결과이다.

2010년 늦가을, '달'님을 통해 '최제훈'이란 작가의 '첫'소설집을(『퀴르발 남작의 성』) 읽었다. 우연치 않은 계기가 아니었었도 결국은 한번쯤 손에 잡았을 것만 같은 상상이 들지만 결국 확신 없는 사후적 추측일 뿐이다. 한 작가의 '첫' 작품을(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면) 읽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처음'이 주는 신선함과 호기심은 자칫 시간을 허비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며 이는 '처음'이 아니어도 '낯선' 작품과 작가를 멀리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제훈'작가는 '최동훈'감독과 친인척이 아닐까 싶을만큼 뛰어난 상상력과 치밀한 구성력으로 단번에 나의 전작주의 작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메리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우연'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이기엔 세월의 흔적이 너무 깊게 아로새겨져 있다. 소설작품에 대한 읽기는 역시 '선택과 집중'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고 '새로운' 작가들이란 이미 검증을 거쳐 당대 한국문학의 한 축을 견인하고 있는 작품들 뿐이었다.

 

 

2011년 초겨울, 난 또 한 번의 '첫' 작품집을 낸 작가를 만난다.

정용준의『가나』

'웹진문지문학상' '젋은작가상'이란 명성(!)도, '알라딘' 메인페이지에 올랐을 때도 '정용준'이란 작가는 적어도 나에겐 여전히 등단하지 못한 이름모를 작가일 뿐이었다. "가장 기대되는 젊은 작가"란 진부한 띠지는 그 진부함만큼 편견을 만들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의 문장들"이란 상찬도 81년생이란 작가의 나이를 본 순간, 과도한 상업적 카피정도로만 느껴졌다. 책의 첫 날개에 실린 작가의 이력인 "'텍스트 실험집단 루' 동인으로 활동 중"조차 '아니 벌써 그룹과 파벌을 형성하려 드네, 이건 겐지가 그토록 혐오했던 문단의 병폐아냐. 적어도 '죽음'을 노래한다면 절대 고독 속에 자신을 투기하여야 하는 거 아닐까'하는 오해로 작동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역시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더우기 "글의 힘을 의심하지 않"는 작가라면.

 

 

 

 

 

 

 

「떠떠떠, 떠」,「가나」는 유치한 표현이지만 '슬픈 사랑의 노래'라 부를 수 있을만큼, 비록 각자의 상처로부터 모든 관계가 절단된 세상에서 또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절대지의 세계로 들어가버렸음에도 '사랑'이라는 울림을 아름다운 노래로, 비록 더듬거리며 분절된 언어일지라도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 사, 사아, 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아, 아야앙, 해"라며 들려주고 있다.

 

 

'정용준'에 대한 확신은「벽」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일명 '폭력의 역사'

폭력적 법과 사회가 먼저였을까, 아님 인간의 폭력적 본성이 그런 사회를 잉태했을까,란 형이상학적 물음 이전에 적어도 폭력은 인간을 아무런 의지도 희망도 없는 '벽'으로 만들어버리는 동시에 인간을 왜곡된 형태일지언정 하나의 주체로 존립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반장21'은 무차별적 폭력과 수탈을 감내하며 '벽'이 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희망이란 결국, 또다른 누군가를 '벽'으로 만들지 않고선, 폭력의 중지나 정지가 아닌 폭력의 연쇄와 유전을 통하지 않고선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9'의 죽음이 인간적 존엄을 상징하지만 결국 그의 존엄이 섬과 사회의 폭력을 중지시키지는 못한다.

소재의 신선함과 폭력적 묘사는 해설자의 말대로 그를 백민석, 백가흠, 편혜영의 계보에 넣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소외와 사회적 냉대로 인한 가학적 망상이 낳았던「먹이」또한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구름동 수족관」「사랑해서 그랬습니다」등에서 보여주는, 이 가열찬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아직도 어떻게 작동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정용준'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벌써 장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또, "소설을 칠백 편 정도 쓰고 싶다'고도 한다.

그리고 난, 정용준을 기억하려 한다.

설마, '칠백 편'은 쓰지 못하겠지만, 읽고 쓰기에 주저함과 회의가 들지 않는 그는 쓰고, 나는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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