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가 강행처리 되었다.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막상 통과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니 뭔가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다. 의회에서의 처리과정이나 정치권의 반응에 대해선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귀가하면서 사들고 온 차가운 캔맥주를 빈 속에 쏟아붙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초겨울의 이른 어둠은 이미 방 안에 꽉꽉 들어차 있다. 어둠과 함께 창틈으로 몰려온 먼 대륙의 밤 공기 속에 눈을 뜬다.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세면을 한 후, 매트릭스의 세계로 접속한다. 최루탄에 몸싸움, 재계의 환영메시지와 '분노' '재앙' '테러' 등 날선-그 날은 분명 여야를 불문하고 현 정치권 전부를 베어리게 될 게다- 어휘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FTA'라는 실체있는 대상이기에 '공포'로 다가와야 하나, 솔직히 아직은 '불안'쪽에 가깝다. 과연 'FTA'라는 '괴물'이 어떤 식으로, 얼마나 강력하게 현실에 뿌리내려 우리네 소소한 일상을 뒤흔들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공포라면 실체를 제거하면 될터이나, '불안'은 싸워야 할 대상 자체가 안개에 휩싸여 쉽사리 가시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문학'은, '이야기'는 계속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계속 되어야'만' 할까?
"문학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다. 일례로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논에 보이는 형태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무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역사적이 즉효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문학은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런 것들에 대항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물론 거기에는 시행착오가 있고, 자기모순이 있고, 내분이 있고, 이단이나 탈선도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문학은 인간 존재의 존엄의 핵을 희구해 왔다. 문학이라는 것 안에는 그렇게 계속성 안에서(그 안에서만) 언급되어야 할 강력한 특질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잡문집 29~30
'FTA'라는 강력한 충격만 아니었다면, 좀더 가볍게, 한없이 기분 좋은 상태로 포스팅을 하려 했었다. 많은 대중성을 지녔음에도 분명 하루키에 대한 호불호가 있고, 그의 팬들에게서조차 이번 '잡문집'은 일방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처음 메일을 통해 신간소식을 접하고서도 '예약구매'를 망설였다. 이웃 블로거님처럼, 하루키의 책은 이미 여러 출판사에서 중복 출간된 이력이 있고 어디선가 한 번쯤은 접해보지 않았을까란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달력과 추가 적립금 등 부차적인(!) 경품에 눈이 멀어 구매를 결정하게 되었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로서는, 하루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언젠가 술에 취해 아는 형님에게, "난 김연수를 좋아하는 여친을 꼭 만날거야"란 말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잡문집』을 읽고나선, 김연수와 등가의 자격으로 '하루키'라는 이름을 넣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20 대가 아닌 30 대 이후의 여성을...
20대 초반『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누군가는 "아직도야, 이젠 좀 하루키를 넘어서야 되는 거 아냐"라고 타박해도 일정부분 동의할만도 한데 여전히 난, 하루키를, 그가 보여주는 세계로부터 고개를 돌리기가 '싫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하루키에 대한 기호는, 분명 자의적 판단이지만, 이십 대와 삼십 대의 경계선 그 어디쯤 가로놓여 있는듯 하다. 난 그 경계선을 넘어서버렸고 지금에 와선, 결국 돌아갈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린 것이다. 천운이라면 그럼에도 여전히 하루키는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고' 달리고 있으며, 그가 달리며 보여주는 풍경과 세계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공감할 수 있다라는 점이다.
스트레이트로 달려오지 못하고 자꾸 곁눈질을 했다.
『RUBBER SOUL』을 오래만에 꺼내 다시 들어봐야 했고,『호밀밭의 파수꾼』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유트브에 들어가 '빌리 홀리데이'의 곡도 들어보고 조만간『위대한 개츠비』도 다시 집어들게 될 것 같다.
문학과 요리, 음악과 마라톤맨이라는 다양한 직업(?)과 인사말에서부터 미발표 단문, 번역과 음악이야기 등 어느하나 계통 없이 흐트러져 있는 말그대로의『雜文集』, 하지만 모든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퍼즐조각들이 모여 완성된 것은 '하루키'라는 정합된 세계다.
여느 하루키의 책과 달리, 읽는 내내 밑줄을 여러번 긋게 만드는 책이다. 포스팅을 할 때 이건 꼭 '인용해야 겠는 걸'했던 문단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문맥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건, 다 FTA 때문이다.
"나에게 음악이 가진 최대의 훌륭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차이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차이도 알고 중간 정도 차이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미묘한 작은 차이도 식별할 수 있죠. 물론 그것은 나한테 좋은 것, 나한테 나쁜 것이라는 뜻이니 그저 개인적인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인생의 질이라고 할 만한 것까지 크게 달라지게 만드니까요.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을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잡문집 114~115p
'나쁜 것과 좋은 것의' 차이를 가름할 수 있는, 어떤 가치들을 축적해나갈 때 바라볼 수 있는 기호들은, 하루키에겐 음악이었듯, 나에겐 어쩜 하루키를 통과한 '문학'과 '음악'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어도 좋다. 아니, 그것이 다양할수록 세상은 좀더 살만한 곳이 될 게다. 그런 것을 가질 수'만'있다면. 하지만 지금 이 사회는 '나쁜 것과 좋은 것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는 가치요소를 점점 말살시켜 버리는 건 아닐까. 끝없는 경쟁과 취업, 노동 속에 결국 '돈'으로 수렴되는 유일한 가치. 이런 세상에서 누가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문학의 계속성'은 이 시대에서 끊기지 않고 이어질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