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여자의 침묵과 남자의 어둠 때문만은 아니다. 『희랍어 시간』, 그 자체에서 연원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숨가쁜 시간을 달려와 다시 만난 일상적 평온 앞에서 느끼게 되는 당혹감, 속에서 다시 돌아본 어제들. 어느덧 두 번의 계절이 별다른 흔적도 남기지 않은채 지나가 버렸고 그 사이 삶의 시계는 서서히 생의 후반으로 시침을 옮겨가고 있었다. 여전히 무언가를 '읽지'만,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가 낯설고 어색해진다. 비 내리는 늦은 새벽, 『희랍어 시간』을 끝냈다. 읽는 내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듯한 존재의 침묵과 어둠은,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현실 밖으로 불러내지 못한다.
『희랍어 시간』은 2008년 늦가을, 작가가 깊은 슬럼프에 빠졌을 당시 씌어진 소설이다. "언어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위기 속에서 '희랍어 시간' 초고를 쓰며 이 고민을 뚫고 나갔다. 이듬해 봄 150여 장의 스케치를 완성했을 때 깊은 수렁을 빠져나온 듯했다. 그 느낌에 힘입어 한동안 손을 놓았던 '바람이 분다, 가라'를 완성했다"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니었어도 『희랍어 시간』은 이미, 처음부터 소설의 내용이나 인물들의 캐릭터는 중요치 않았다. 한강의 작품은 그 자체로 삶의 고통과 결핍의 순수한 덩어리이며(적어도 이제껏 내가 읽은 한강은 그랬다), 때문에 『희랍어 시간』은 다시 돌아온 일상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삶의 불안과 결핍, 상실이자 또한 오로지 그러한 것들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실존의 체험이기에. 일종의 메타적 독서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語은 형상화되지 못한다. 『희랍어 시간』 바로 이전에 읽은 책이 『하이데거』다. 그의 말을 빌어와 『희랍어 시간』을, 오로지 경제적 불안만이 유일한 실존적 불안이 되어버린 세계. 그 세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던 어둠과 침묵들. 그리고 동시에 내동댕이쳐진 존재와 시간들을 나는, 우리는 소설과 읽기를 통해서나마 힘겹게, 끙끙대며 끌어와 마주대한다. 그래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란 어디로부터 도망을 가는 것인데, 도망가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이때 내가 거기에서 도망가려는 바로 그 '나'가 사실은 '본래의 나'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더 이상 안전함, 편암함, 포근함에 머물러 있지 않을 때 불안은 다가오며 우리는 화급하게 도망가게 되는데, 그 도망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불안을 그 자체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 곧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갖는 사람은 자신을 대면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 동안 자기가 매달려 있던 것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이 아무것도 아님이 곧 '무無'인데,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는 것을 그가 그간 매달려 왔던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으로 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비로소 나는 그들 속에 푹 빠져 있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고, 나 자신을 대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을 스스로 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결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단을 계속 유보한다. 하이데거는 안절부절함을 불안의 표식이라 하면서 이제 안절부절함을 제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안절부절함 속에서 자신을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기상, 존재와 시간)
침묵과 어둠이 불안이라면, '불안에 대한 용기'와 '결단'은 그 속에서 본래적으로 드러나는 빛일 터이다.
동의하든 하지 않든, 『희랍어 시간』은 그렇다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