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의식의 지근거리에 있는 것들만 펼쳐보아도,
일본 도심의 한복판에서 일어나 옴진리교의 사린가스 테러,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러시아와 서유럽, 중동에서의 셀 수도 없이 자행되는 테러, 또다시 일본의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사고, 가장 가까이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인간이 살기에 안전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북유럽, 노르웨이에서의 총기 테러사건까지. 가히 자연적·인위적 파국의 조종이 울리가라도 한듯 전세계가 불안과 공포에 잠겨있다. 어제 본 저녁 뉴스에서는 미국 남서부 지역의 정전사고로 600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순간적인 암흑의 세상을, 이성과 과학으로 덧씌운 문명이란 외피가 얼마나 얇고 허약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까지 있었다. 환경적 재앙을 배제한, 적어도 문명 자체가 배태한 이런 공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복잡하고 먼 거리에 있는 시스템들에 의존하며 따라서 심지어 아주 작은 고장, 사소한 문제점만 생겨도 거대하도 걷잡을 수 없는 악영향이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삶에 가해지는" 장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신과 자연으로부터 절연한 채 외부적 공포를 조율하고 억제하기 위해 달려왔던 근대의 진보적 역사를, 바우만은 결코 직선적인 발전으로 보지 않고 단지 동일한 지점을 향해 '우회'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그렇게도 멀리 돌아와 마주친 현재와 근미래는, 과거의 자연적 재난이나 신(화)적 파국이 줄 수 있는 공포의 범위를 뛰어넘어 현실적인 '종의 종말'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기실 바우만은 '유동하는' '액체' '근대' '공포' 등을 표지삼아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우울한 전망을 그려나가고 있지만, 어쩐지 공포 보다는(공포는 두려워 할 특정한 대상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안'이라는 어휘가 현대인의 실상에 보다 근접해 보일뿐 아니라, '공포'라는 투시경을 통해 바라 본 '세계화'의 병폐는 이제 그닥 새로울 것도, 그로인한 각성이나 자각도 불러오지 않을 정도다. 내가 느끼는 '공포'는 바우만이 펼쳐 놓았던 공포들, 테러와 환경재앙, 그로인한 전쟁과 과다한 안보의 일상화, 라기 보다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 총기테러와 같은 숱한 재난들은 결국, 짧은 애도와 흥분의 시간이 지난 뒤엔 '나와는 무관한' 종류의 '사건'이 되고마는 현대의 시스템이다. 이미지가 실제를 압도한다고, 가상이 실제를 구축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이미지는 현실보단 환상과 가까워 보이고 그런 환상들은 어느정도 나와는 거리를 둔채 발생하기 때문이다. 파국이 나에게 닥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재앙을 잊을 수 있는 다양한 문화와 상품을 소비하고, 그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한다.
그러는 사이 자본주의는 끄떡도 하지 않고 순간적인 불안정을 '평형회복'한다. 오히려 "널리 퍼진 환경재앙은(뿐 아니라, 각종 테러와 전쟁, 살인 사건 등도 포함 된다.) 자본주의를 위험에 빠트리기는커녕 이제것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투자공간을 펼쳐놓아 자본주의에 새 힘을 불어넣으리라 보아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p42)
이런 암울한 시대를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한다면, 역시 『유동하는 공포』는 존재의미가 없었을테고, 출간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시적이고 더이상 방어할 수조차 없을 것처럼 견고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바우만은 '병 속의 편지'를 만들어 세상에, 미래에 띄워보내려 한다. 예언자(지식인들)의 역할은 다가올 파국을 경고하고, 그들이 예언한 미래가 결코 도래하지 않도록, 언젠가 어디선가 자신들의 띄워보낸 '병 속의 편지'를 읽고, 자각하고 행동하는 이들(민중 또는 인류전체)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물론 너무나 미약하고 자가 안위적 처방일 순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조차 하지 않는다면...이란 생각을 떨쳐낼 수없다. 그리고 바우만이 주장한 예언자(지식인)의 역할 상대자인 나와 우리는, 역시 그들이 송신한 메시지를 수신하고 해석하고, 실천하는 -그것이 아무리 하찮고 미비한 것일지라도- 것밖엔 도리가 없지 않을까. 약간 맥락이 다르지만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지젝의 말을 좀더 인용해 보자면,
"파국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출 때까지 행동을 미룬다면 그러한 지식을 획득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가 의존하는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
인식과 실천의 선후를 지적하는 내용이지만, '읽기'를 통한 자발적 노력 없이, 휘황한 소비문화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읽기'를 배제한 '인식'일 불가능하듯, '읽기' 없는 '실천' 또한 요원한 희망일 수밖에 없다.
'병 속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것, 그건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갖는 윤리적 권리이자 의무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