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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이상한 습관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14,400원 (10%800)
  • 2015-10-08
  • : 20,743

2017. 02. 16. ~ 02. 22.

 

'전차병' '보병' '자동소총병' 같은 보직은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 역사학자와의 대화 중에서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p. 31) 듣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차분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신중하게 해야 할 말만 골라 한다는 것.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 어두운 면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한다.(p.188)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p.373)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중략) 하지만 왜? 나는 여러 번 자신에게 물었다.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자신들의 언어와 감정들을 지키지 못했을까? 여자들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나의 또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자들의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렸다......(p.17~18)

 

여자들이 전쟁에 대해 아무리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도, 기본적으로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전쟁은 살인행위'라는 생각이 또렷이 박혀 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전쟁은 '힘겨운 일'이자 '평범한 보통이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네들은 전쟁터에서도 노래를 하고, 사랑에 빠지고 머리를 매만졌다......(p.29) '......이들은 여전히 그 시절에 애정을 느낀다. 이들에게 그 시절은 단지 전쟁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젊음이었고 첫사랑이었다.'(p.34) 나는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중략) 그네들의 세계에서는 일상과 존재가 하나였고, 따라서 존재의 흐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쟁도 평범한 삶의 한때일 뿐이었다.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을 압도하는 순간을 여러번 목도했다. 역사마저 간단히 제압해버리는 그 순간을. "내가 전쟁터에서만 예뻤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p.338)

 

고통은 남루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아픔, 그건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이다.(p.20)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 고통은 지난한 삶의 증거이다. 다른 증거 따윈 없다. 다른 증거 같은 건,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했던가.(p.32) 나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p.170)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p.225) 나는 아직도 내가 살아남았다는게 안 믿어져. 살아 있다는게......부상도 당하고 상처도 입었지만 이렇게 멍쩡하게 살아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p.262)

 

전쟁은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 속에 새겨넣었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넣었다.(p.286)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p.25)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p.37)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p.60) 나는 이야기란 게 원래 시간이 지나 글로 옮겨질 때보다 말로 뱉어질 때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표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말할 때 그 사람의 눈빛과 팔의 움직임을 '녹음하지' 못하는게 안타깝다. 대화하는 동안 드러나는 그들의 삶, 즉 그들 본래의 삶과 그들 각자의 삶을, 그들의 '텍스트들'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p.196)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p.268)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p.14) 다른 세상,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조차 할수 없는 우리는, 언젠가 다르게 사는 법을 오랫동안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p.15) 남들에겐 평범한 것들을 나는 새로 배워야 했어. 평범한 보통의 삶을 기억해내야 했어. 정상적인 삶을! 누구랑 그 어려움을 나눴냐고? 힘들 때마다 옆집 여자에게 달려가고......엄마에게 달려가고, 그랬지......(p.83) 맹세는 했지만, 필요하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군인의 맹세는 했지만 정말 죽고 싶지는 않더라고. 하지만 거기서 살아 돌아간다해도 마음이 병들 것 같았어.(p.84)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승리...... 예전에 그네들에게 삶이란 평화와 전쟁으로 나뉘는 것이었다면, 이제 그네들에게 삶은 전쟁과 승리로 나뉜다. 또 다시 두개의 다른 세상, 두개의 다른 삶이다. 기껏 증오하는 법을 익혔는데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오래전에 잊힌 감정들을, 잊힌 말들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전쟁의 사람이 전쟁의 것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했다.(p.511)

 

사람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지나온 세월이 바로 자신의 삶이었으며, 이제 그 삶을 받아들이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p.21) 과거는 사라졌다. 과거는 뜨거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눈을 멀게 하고는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사람은 남았다. 평범한 보통의 삶 한가운데 사람만 남은 것이다.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평범하다.(p.255)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내 귀에 들리는 건 오직 하나, '승리!'라는 말뿐이었어. 그리고 갑자기 미치도록 살고 싶은거야! 지금 당장 우리가 삶을 시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표창 받은 메달이며 훈장을 죄다 꺼내서 주렁주렁 달고 사진을 찍었지. 그런데 왜 그런지 꽃밭에서 찍고 싶더라고. 그래서 화단을 찾아 들어가 사진을 찍었어.

 

  책에 너무 많은 스티커가 붙었다. 마음에 와닿는 글귀 하나 하나에 붙이다보니 무지개 빛이다. 나열식을 정리하다가 관련된 것들끼리 묶었더니 이야기가 된다. 읽은지는 한참인데 일에 쫓기다 보니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정리를 한다. 정리하면서 다시 읽게 된 책은 또 다시 나를 과거의 어느 사람들과 연결시켜 놓았다.

 

  한때 만났던 폭력피해여성들. 그들의 삶 자체를 듣기보다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폭력의 공간 안에서도 있었을지 모를 따뜻함과 사랑은 회피하고 무시했던 당시가 떠올랐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온전히 듣고 싶다. 그네들의 삶을. 가정에서의 폭력,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돌봐줄 울타리가 될 수 없었던 구조적 문제들로 인해 가장 아름다웠을 나이를 전쟁에서 보냈다고 하는 책의 여성들처럼...내가 만난 여성들 또한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폭력의 공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선을 긋지 않고, 무엇인가를 증명하겠다는 논리 없이 온전히 그때와 현재로 이어지는 그네들의 삶을 온전히 들을 기회가 다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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