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내가 걸었던 거리들

 

이탈한 자가 문득

김 중 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몇 날 며칠을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길 위를 헤맨 듯싶다. '나의 서재'라고 팻말 붙여 둔 이 방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난 말하자면 도망을 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 사이 밤마다 희안한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어느 것이 현실인지,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몸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어릴 적부터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선잠에서 깨어나면 방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기까지 한참 마음속으로 사방 벽을 더듬거리곤 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 데 좀 오래 걸리는 부류인 것이다. 

'도망중'인 사이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다.  문득 고개 들어 휘 둘러보니 그리 멀리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러면 그렇지. 네가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읽다가 밀쳐둔 책들로 어지럽혀진, 그 사이 문 한번 열어 보지 않은 먼지투성이 서재의 창문으로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햇살 한 줄기 비쳐 들어온다.  엄살 떨지 말고, 변명 따위 하지 말고, 방 청소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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