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흠 작가의 소설을 드디어 접했다. 우리 사이를 누가 가로 막고 있던 것도 아닌데(게으름을 제외하면) 많이도 늦었다. 초기작을 읽는 편이 좋았을까? 그래도 작고 - 얇은, 단편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힌트는 도련님>을 선택했다. 최근작 <나프탈렌>은 장편이라.
총 8개의 단편은 크게 '소설쓰기'에 대한 것과, 원래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알려진 '가혹한 세계'에 대한 것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소설가로서 자신을 반영한 듯한 '그래서', '힌트는 도련님', 'P'는 소설을 쓰는 일과 소설가에 대한 소설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뒤에 해설에는 '모더니스트'로서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한다고 한다. 나머지 단편들은 '리얼리스트'로서 써내려간 소설들이고.
'힌트는 도련님'에서 작가 P는 직업란에 당당히 소설가라고 적고 싶은 작가지만, 어머니에게 선을 종용당하고 있는 노총각이다. 게다가 쓰고 있는 소설은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으니 스토리가 산으로만 간다. P가 쓰고 있는 소설 자체도 웃기지만 소심한 생활인인 P의 고뇌는 귀여울 정도라 '도련님'이라 부를만 하다. 소설쓰기에 대한 그의 고뇌는 백가흠 작가 자신의 고뇌일까?
형식의 시도는 항상 사실적인 서사 앞에 굴복했으며, 나는 그것이 가장 고통스럽다. 결국 내 소설의 맨 처음 시도와 의도는 이미 내게서 빠져나가 사라져버린 것인데도, 나는 안타깝게 그것들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콤플렉스나 다름없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흔히 영화판에서 상업주의 감독들과 작가주의 감독들의 양면적인 콤플렉스 같은 것 말이다.
나는 행복한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소설은 충족이나 낭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결핍이나 불합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조리에 대한 욕망을 다루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행한 일이다. 부조리함의 해결에 대해, 즉 욕망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스트'로서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그야말로 참혹하다. '쁘이거나 쯔이거나'의 내용은 읽으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근원'은 깊은 밤 산중을 헤매며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불빛과 폐가, 툇마루로 떨어지는 꽃잎의 이미지 등이 매우 아름다워 좋았지만, 근원씨의 인생이 너무나 고달파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낙타가 들어왔다', '통'의 주인공들 역시 행복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나 그들에게 가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게 소설 속 인물들은 '성냥팔이 소녀'의 이미지다.(비록 대부분이 아저씨지만)
생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막상 그 상식을 내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담담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러니 나에게 이정도라도 주어진 것이 행운임을 깨달아 생의 제비뽑기에서 최악의 수를 뽑은 사람들을 섣불리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 것. 새삼 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