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목이 오늘날처럼 길어진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 대답은 너무나 뻔합니다. 높은 나뭇가지에 달린 잎을 따먹기 위해 자꾸만 목을 길게 뻗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을 겁도 없이 덜컥 내놓는 사람은 은연중에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마는데, 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천재가 저지른 희귀한 오류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입니다. 도대체 그의 주장이 왜 틀렸으며, 용불용설이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킨 배경은 무엇일까요?
라마르크는 인류 역사상 거의 최초로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주장한 탁월한 박물학자였습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1859)보다 무려 50년이나 앞서 진화의 개념을 체계화한 『동물철학』(1809)을 발표했는데, 일부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탄생하는데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음은 틀림없었습니다. 그가 끼친 영향을 『생각의 역사』 속에 담긴 문장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라마르크는 진보주의를 열렬히 옹호했다. 화석의 생물종이 지금도 살고 있는 생물과 유사하다는 것을 관찰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여기에 착안한 그는 어떤 종의 경우 멸종한 게 아니라 환경 변화에 따라 달라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물은 아마 "우리가 식별하지 못할 만큼 크게 변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윈 이전에 나온 적응의 개념이다. 라마르크는 지구의 나이가 무척 오래며, 생명 형태도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인간이 이 진보의 최종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라마르크의 진화 관념은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자연이 복합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둘째, 그는 생물체의 기관이 사용할수록 강해지고 강화되며, 이 획득형질은 후대에 전해진다고 믿었다. "획득된 변화는 양성에 공통적이며,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이런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다윈의 자연선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914∼915쪽)
-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 Ⅰ』
라마르크의 주장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된 건 후천적인 노력으로 획득한 형질이 자식에게도 유전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유전학에 대한 연구가 전무했던 시절이어서 라마르크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증명하거나 반박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였던 에라스무스 다윈과 괴테 등이 일찌감치 라마르크의 주장이 틀렸음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의 머릿말 앞에도 그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담겨 있는데,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대한 찰스 다윈의 입장까지도 엿볼 수 있는 만큼 자세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나는 종(種)의 기원에 관한 학설 진보에 대해 그 개요를 쓰고자 한다. 최근까지 박물학자들이 종은 불변하는 것이며 저마다 각각 창조된 것으로 믿어왔다. 이 견해는 여러 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왔다. 한편 몇몇 박물학자들은 종은 변화하는 것이고, 현존하는 생물의 종류는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진정한 생식에 의해 태어난 자손이라 믿고 있었다. ······
라마르크는 이 문제에 대해 주목을 끄는 결론을 내린 최초의 사람이었다. 탁월한 박물학자로서 1801년 자신의 견해를 처음 발표했다. 그는 1809년 《동물철학》에서, 그 뒤 1815년에는 《무척추동물지》 서론에서 좀 더 폭넓게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들 저서에서 라마르크는 인류를 포함한 모든 종은 다른 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을 주장했다. 그는 최초로 생물계는 물론 무생물계에 있어서도 모든 변화는 법칙의 결과이며, 결코 기적적인 어떤 개입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라마르크가 종은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주로 종과 변종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어떤 유(類)에 속하는 여러 종류는 거의 완전한 단계성을 보여준다는 것, 또 사육하고 재배하는 생물의 상이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변화의 방법에 대해서도, 그는 어떤 것은 생활의 물리적 조건에, 어떤 것은 기존 종류의 교잡에, 그리고 대부분의 것은 쓰임과 쓰이지 않음, 즉 습성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연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훌륭한 적응-이를테면 나뭇가지에 난 연한 나뭇잎을 먹고 사는 기린의 긴 목-을 이 마지막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2
*2 나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 박사가 1794년에 간행한 《동물생태론》에서 라마르크의 견해 및 그의 의견이 틀린 근거를, 그(이시도르 조프루아 생틸레르)보다 먼저 대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시도르 조프루아에 의하면 괴테(Goehte)도 1794년과 1795년에 써 두었으나, 훨씬 뒤에 이르기까지 간행하지 않았던 저작의 서론을 통해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열심히 주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건대 소는 무엇 때문에 뿔을 사용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뿔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박물학자에게 있어서 장래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적확하게 지적했다. 독일에서는 괴테, 영국에서는 다윈 박사, 프랑스에서는 조프루아 생틸레르가 1794∼95년에 종의 기원에 대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대체로 유사한 학설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매우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종의 기원에 대한 학설 진보의 역사적 개요> 中에서
이처럼 라마르크의 학설은 18세기말부터 이미 당대의 몇몇 저명한 인물들에 의해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 정도의 반대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용불용설의 슬픈 전주곡>일 뿐이었습니다. 진화론의 끝판왕인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생물종 진화의 원인으로 『자연선택 이론』을 내세웠는데, 같은 생물종 내에서도 유리한 변이를 지닌 개체는 환경에 보다 쉽게 적응하고 마치 자연이 선택한 것처럼 살아남아 번성하고 진화한다는 이론이었습니다. 이른바 적자생존의 논리인데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는 명백히 다른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윈이 라마르크의 주장을 완전히 배척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유전에 관한 메커니즘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사용과 불용에 관한 찰스 다윈의 주장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지요.
가축의 경우 사용하는 부분은 강하고 커진다는 것, 사용하지 않는 부분은 작아진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유전한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로운 자연 상태에서는 우리는 조상의 형태를 모르는 까닭에, 오래 계속된 사용 또는 불사용의 작용을 판정할 수 있는 비교기준을 세울 수가 없다. 많은 동물들은 불사용의 작용으로서 설명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오언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연계에는 날지 못하는 새만큼 기이한 것은 없는데, 실제로 날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새가 많이 있다. ……(148쪽)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제5장 변이의 법칙」 중에서
카르니올라와 켄터키의 동굴에 서식하는 매우 다양한 강(鋼)에 속하는 많은 동물들이 장님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게는 눈은 없어졌지만 눈자루는 남아 있는데, 이것은 렌즈가 달린 망원경은 없어지고 망원경의 대만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어둠 속에서 서식하는 동물의 경우, 눈은 쓸모없는 것이지만 어떤 점에서 유해하다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눈이 없어진 것은 불용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151쪽)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제5장 변이의 법칙」 중에서
이처럼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나름대로의 지지를 확보한 채 다윈의 생존경쟁 이론과도 양립할 수 있다고 여겨지면서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된 1900년 이후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20세기 초반에는 '생명의 진화'에 관한 또다른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 『창조적 진화』라는 작품이 발표되는데, 과학서적으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 덕분에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그 책 속에서도 '획득형질의 유전'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철학자이면서도 과학자의 면모가 엿보이는 앙리 베르그송의 얘기를 들어보지요.
변이의 원인은 심리적 질서에 속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매우 확장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여전히 노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실인즉 노력 자체를 파고들어가 더 심층적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 생각으로 이러한 태도가 특히 요구되는 경우는 규칙적으로 유전되는 변이들의 원인에 도달하고자 할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획득형질의 유전 가능성에 관한 세부 논쟁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역량에 속하지 않는 문제에서 명백한 입장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 문제만큼 오늘날 철학자들이 애매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과학자들의 뒤를 따라 세부 실험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결과를 논의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도 없다.(131쪽)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이렇게 시작해서 앙리 베르그송은 진화론을 둘러싼 오랜 화두인 '획득형질의 유전 문제'를 검토하는데, 『동물철학』(1809) 출간 100주년을 코앞에 두고 죽은 라마르크가 또다시 불려나온 셈이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은 끝에 사망했고,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이듬해 7월 혁명의 와중에 묘소가 사라지는 불운까지 겪은 인물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라마르크는 생명체에게 기관의 용불용(用不用)에 의해 변화하는 능력과 이렇게 획득된 변이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부여한 바 있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학설에 오늘날에도 일정수의 생물학자들이 합류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신종을 산출하기에 이르는 변이는 배 자체에 내재하는 우연변이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유용성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결정된 특성들을 전개시키는 고유한 결정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 조건에 적응하려는 생명체의 노력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은 외적 환경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야기된, 특정한 기관의 기계적 훈련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의식과 의지를 내포할 수도 있는데, 이 학설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의 한 사람인 미국의 자연학자 코프Cope는 노력을 바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마르크주의는 비록 거기에 필연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의 현재적 형태들 전체에서 유일하게 진화과정의 내적이고 심리학적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서로 독립적인 발달선상에서 동일한 복잡한 기관들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진화론이기도 하다.(130쪽)
앙리 베르그송의 설명을 들으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떠오를 정도로, 같은 프랑스 국적의 생물학자인 라마르크를 왠지 감싸고 도는 듯한 느낌도 없진 않지요. 아무튼 그의 설명을 조금만 더 들어보지요.
사람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은 종종 습관이거나 습관의 결과이다. 그리고 길들여진 습관의 기초에 자연적 성향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유전된 것이 개체의 몸soma이 획득한 습관인지 아니면 차라리 길들여진 습관에 앞서 있는 자연적 성향은 아닌지 항상 자문할 수가 있다. 이 성향은 개체가 자신 안에 보유하고 있는 배germen에 내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이 개체에, 즉 배에 이미 내재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두더지가 앞을 못 보게 된 것은 그것이 땅 밑에서 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두더지가 지하 생활을 할 운명에 처한 것은 그것의 눈이 쇠약해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시력을 잃는 경향은 두더지 자체의 신체에 의해 획득된 것도 잃은 것도 없이 배에서 배로 전달될 것이다. 검술 사범의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빨리 탁월한 검술사가 되었다고 해서 부모의 습관이 아이에게 전달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가하는 도상에 있는 어떤 자연적 성향들이 아버지를 낳은 배에서 아들을 낳은 배로 넘어가 원초적 약동의 결과로 도중에서 커지고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것보다 더 큰 유연성을 확보해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점진적 길들이기에서 나오는 많은 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되는 것이 길들여진 습관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자연적 성향이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길들이기 위해 이러저러한 특수한 종이나 그것의 어떤 대표자들을 선택하게끔 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132∼134쪽)
* (역주) 획득형질의 유전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여기서 베르그송은 아직 논쟁 중인 당대의 모든 실험과 가설을 검토함으로써 획득형질의 유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서고 있다.
방금 살펴본 것처럼,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부정된 건 20세기 중반이었습니다. 라마르크의 『동물철학』(1809)이 출간된 후 무려 1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 학설은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킨 셈인데, 정말 놀랍게도(!) <기린의 목이 왜 늘어났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을 둘러싼 논쟁은 최근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앙리 베르그송이 지적했던 애매한 일반성이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탓이겠지요.
이쯤에서 우리는 이토록 애매한 문제에 대해 뭔가 결정적인 한방을 터트려줄 인물은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게 됩니다. 제가 찾은 인물은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입니다. 그는 하필이면 1860년에 사망했는데, 『종의 기원』이 출간된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가 다윈의 책을 읽어봤는지 여부와는 별도로, 그는 다윈 못지 않게 해박한 생물학 지식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죽기 훨씬 이전에 <라마르크의 오류>를 너무나 정확하게 짚어낸 인물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독일 철학자가 1936년에 발표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 담긴 내용을 중심으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작품들은 그의 철학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적지 많지만 조금만 인내하고 들어보시면 차츰 이해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우선 쇼펜하우어 특유의 <의지의 형이상학>이 뚜렷이 드러나는 다음 문장부터 살펴보지요.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사상은 완전히 잘못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단순한 오성에 의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우리에게 동물적 자연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전적으로 세계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원리로서, 즉 가장 늦은 근원의 산물로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결코 세계 현존의 조건이었을 수 없으며 지성계(mundus intellegibilis)가 감성계(mundus sensibilis)에 선행할 수도 없다. 지성계는 감성계로부터만 재료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자연을 산출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성을 산출했다."(94쪽∼9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어떻습니까? 참으로 명쾌한 논리이지요.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칙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동물에게도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방식이 요구하는 기관이 부족하지 않았고, 모든 기관은 가장 다양한 기관들조차 조화를 이루며 전적으로 특별히 규정된 생활방식을, 그 동물의 노획물이 있는 영역을, 추적을, 승리를, 그 노획물을 분쇄하고 소화시키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합쳐져서, 동물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영위하려는 생활방식이 그 동물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었으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그 상황이 바로, 생활방식과 그 외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구조에 선행하고 그에 맞게 모든 동물이 형체를 얻기 전에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는 식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 전에 자신의 모든 도구, 즉 산탄총, 산탄, 화약, 사냥 포대, 사냥칼, 의류를 그가 죽이려는 사냥감에 적합하게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엽총을 갖고 있으므로 야생 암퇘지를 쏘는 것이 아니라, 야생 암퇘지를 잡으러 나섰으므로 새총이 아니라 엽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나, 그 증명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이 부가된다. 즉 많은 동물에게서 그것들이 아직 성장하는 동안에는 의지의 지향이 그 지향에 필요한 신체 부분이 있기도 전에 표현되며, 따라서 그 신체 부분의 사용이 그 현존에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숫염소, 숫양, 송아지는 아직 뿔을 갖기도 전에 맨머리로 들이받는다. 어린 수퇘지는 자신의 행위가 의도하는 결과에 상응할 어금니가 아직 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둘러싼 측면을 들이받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침으로 무장한 곤충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표명했다. "그것들이 투지를 가지므로 무기를 갖는다"(『동물의 부분에 관하여(de partibus animalium)』, 제4권, 6장). 나아가 그는 (12장에서) 대체로 "자연은 그것의 활동을 위해 기관들을 만들지만 기관들로 인해 활동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모든 동물의 구조는 그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98쪽∼10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쇼펜하우어가 이 대목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낸 건 참으로 탁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찰스 다윈도 훗날 『종의 기원』에서 이와 똑같은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니 말이지요. 바로 뒤이어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라마르크의 오류의 본질>을 여지없이 강타합니다.
희귀한 오류에 빠진 라마르크
이 진리는 사려 깊은 동물학자와 동물해부학자에게 명백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그의 정신이 더 심오한 철학을 통해 정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진리로 인해 희귀한 오류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은 잊히지 않는 일류 동물학자인 라마르크에게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이라는, 동물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따른 구분을 발견함으로써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 말하자면 『동물 철학』제1권 7장과 『무척추동물의 자연사』제1권 서문에서 그는 모든 류(類), 모든 동물종의 형태, 고유한 무기, 외부로 작용하는 기관은 결코 이 종들의 원천에서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물들의 위치와 환경의 성질을 불러일으킨 동물들의 의지 지향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반복적 노력과 그것에서 나오는 습관을 통해 시간의 과정에서 서서히, 그리고 계승되는 세대를 통해 비로소 발생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주장하고 상세히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새와 포유류는 헤엄치면서 발가락을 따로따로 뻗음으로써 서서히 물갈퀴를 획득했고, 붉은 뇌조는 물 위를 걸어서 건넘으로써 긴 다리와 긴 목을 얻었다. 뿔 달린 가축은 쓸모 있는 치아 없이 머리로만 싸웠고 이 투지가 서서히 뿔을 만들었으므로 비로소 서서히 뿔을 얻었다. 달팽이는 처음에는 다른 연체동물과 같이 더듬이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 앞에 놓인 대상을 만져야 하는 필요성에서 그와 같은 것이 서서히 발생했다. 모든 고양이과 동물은 노획물을 갈기갈기 찢어야 하는 필요성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발톱을 획득했고, 이 발톱을 걸을 때 보호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방해받지 않아야 하는 필요성에서 발톱 집과 민첩성을 획득했다. 기린은 건조한 풀 없는 아프리카에서 높은 나무의 잎을 얻기 위해 앞다리와 목을 길게 뻗어서 20피트 높이의 놀라운 키를 획득했다. (100쪽∼10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여기까지의 설명만으로도 라마르크가 왜 틀렸는지 대략이나마 감이 잡히시지요? 아직도 뭐가 뭔지 아리송할 뿐이라고요? 지극히 당연합니다. 생물학의 창시자인 라마르크도 아무런 의심없이 덜컥 저지른 실수였으니까요. 그런데 라마르크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요?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집중해서 쇼펜하우어의 설명을 들어보지요.
매우 정확하고 심오한 이해를 통해 성립한 천재적인 오류
그리고 그렇게 라마르크는 많은 동물종을 동일한 원리에 따라 발생하게 하여 검토한다. 여기서 그는 사실상, 동물종이 그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무수한 세대의 과정에서 자신의 보존에 필수적인 기관을 서서히 산출하기 이전에 그 기관이 없어서 그동안 죽고 멸종했어야 한다는, 눈에 띄는 반론을 주목하지 않았다. 받아들여진 하나의 가설은 그렇게 통찰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 가설은 자연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심오한 이해를 통해 성립한 천재적인 오류다. 이 오류는 그 안에 놓인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에게 여전히 명예로운 일이다. 그 안에 있는 참된 것은 자연 탐구자인 그에게 귀속된다. 그는 동물의 의지가 근원적인 것이며 그 조직체를 결정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보았다. 반면에 틀린 것은 프랑스에서 형이상학의 낙후된 상황에 짐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원래 여전히 로크와 그의 나약한 추종자 콩디야크가 대세를 이루었고, 그래서 물체가 사물 자체이고 시간과 공간이 사물 자체의 성질이어서, 그곳에는 아직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의 관념성에 대한 그렇게 매우 중요한 위대한 학설이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라마르크는 존재에 대한 해석을 시간 안에서, 즉 계열을 통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02쪽∼10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런 설명을 듣고 나면 누구나 '라마르크의 천재적 오류'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테지요. 계속해서 쇼펜하우어의 심오한 설명들을 더 살펴보지요.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끝까지 전개시킬 용기를 가졌더라면
독일에서 유래한 칸트의 깊은 영향은 프랑스 인들의 부조리한 극단적 원자론과 영국인들의 감동적인 자연신학적 고찰을 그렇게 했듯이 이런 종류의 오류들을 영원히 추방했다. 위대한 정신의 영향은, 허풍선이와 사기꾼을 추종하기 위해 그 정신을 떠날 수 없었던 국가에서조차 유익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나 라마르크는 동물의 의지가 사물 자체로서 시간 밖에 놓이고 그런 의미에서 동물 자체보다 더 근원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결코 이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결정적인 기관 없이, 또한 결정적인 지향도 없이 지각으로만 무장된 동물을 가장 먼저 설정한다. 이 지각이 그 동물에게 살아야 하는 상황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 인식으로부터 그 동물의 지향, 즉 그 동물의 의지가 발생하고, 이 의지로부터 최종적으로 그 동물의 기관이나 특정한 체현(體現, Korporisation)이, 게다가 세대의 도움으로 그래서 무한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다. 라마르크가 이 생각을 끝까지 전개시킬 용기를 가졌더라면, 그는 어떤 형상도 기관도 갖지 않아야 할, 그리고 이제 기후와 지역적 상황 및 그에 대한 인식에 따라 모기에서 코끼리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무수한 동물 형태로 변화했을 어떤 원초동물을 가정했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 원초동물이 생명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서 이 의지는 형이상학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히 모든 동물종은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통해, 그러나 시간 속에 있는 물리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시간 밖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그것이 살려고 하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형태와 조직을 결정했다. 의지는 인식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인식은 의지가 단순히 우연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서, 심지어 제3의 것으로서 나타나기 전에 동물과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지가 최초의 것이고 본질 자체다. 의지의 현상(인식하는 지성과 그 형식인 공간과 시간에 있는 단순한 표상)은 이 특별한 상황에서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모든 기관들로 무장된 동물이다. 이 기관에는 지성 즉 인식 자체도 속한다. 그리고 이 지성은 나머지 것들과 같이 모든 동물의 생활방식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반면에 라마르크는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의지가 형성되도록 했다. (103∼104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이렇게 해서 라마르크의 오류에 대한 설명을 끝낸 쇼펜하우어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의 생물학 강의를 마음껏 펼쳐놓습니다. 그의 설명을 듣노라면 찰스 다윈도 울고 갈 정도입니다. 계속 들어보지요.
의지의 모든 특별한 노력은 형태의 특별한 변이 속에서 나타난다
동물의 무수한 형태를 고찰해보라. 그 모든 형태가 철두철미 그 동물이 의욕하는 것에 대한 모사일 뿐임을, 그 동물의 특성을 만드는 의지 지향의 가시적인 표현일 뿐임을 보라. 형태의 다양성은 특성들의 이 다양성에 대한 그림일 뿐이다. 싸움과 약탈에 주의를 기울이는 맹수들은 무서운 이빨과 발톱 그리고 강한 근육을 갖고 있다. 맹수들의 시력은, 특히 독수리나 콘도르 같이 현기증 나는 높이에서 자신의 노획물을 정찰해야 할 때 먼 곳까지 이른다. 싸움에서가 아니라 도피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의지를 갖는 겁 많은 동물들은 무기 대신 가볍고 빠른 다리와 예민한 청각을 갖고 나타난다. 그들 중 가장 겁 많은 토끼에게서 청각은 심지어 귀가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을 요구했다. 내부는 외부에 상응한다. 육식동물은 짦은 내장을, 초식동물은 더 긴 동화과정을 위해 긴 내장을 갖는다. 강한 호흡과 빠른 혈액 순환은 적합한 기관을 통해 표현되어, 더 큰 근력과 자극성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제공되면, 어디에서도 모순은 가능하지 않다. 의지의 모든 특별한 노력은 형태의 특별한 변이 속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획물이 있는 곳이 추적자의 형태를 결정했다. 노획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활동 영역, 먼 은신처, 밤이거나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있다면, 추적자는 그곳에 맞는 형태를 갖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생명에의 의지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그 안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만큼 기이한 일은 없을 것이다.(104쪽∼10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쇼펜하우어의 생물학 특강은 계속 이어집니다~
솔잣새, 붉은 뇌조, 개미귀신, 펠레컨, 부엉이, 큰 메기, 전기뱀장어, 전기메기, 맵시벌
전나무 열매의 표피에서 정충(精蟲)을 끄집어내기 위해 솔잣새(Loxia curvirostra)는 비정상적 형태의 먹이 섭취 기관을 갖고 있다. 습지에서 파충류를 찾기 위해 붉은 뇌조는 너무 긴 다리, 너무 긴 목, 너무 긴 부리를 갖는 가장 놀라운 형태로 나타난다. 흰개미를 파내기 위해 네 발의 긴 개미귀신은 짧은 다리와 강한 발톱, 그리고 실 모양의 끈적끈적한 혀를 지닌, 길고 좁고 치아 없는 주둥이를 갖고 나타난다. 펠리컨은 상당히 많은 물고기를 담기 위해 기괴한 주머니를 갖고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부엉이는 밤에 자는 것들을 기습하려고 어둠 속에서 보기 위해 굉장히 큰 동공을 가지며, 날 때 나는 소리가 자는 것들을 깨우지 않도록 매우 부드러운 깃털을 갖고 날아간다. 큰 메기, 전기뱀장어, 전기메기는 노획물에 도달할 수 있기 전에 그것을 마비시키기 위해, 또한 자신들의 추적자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완벽한 전기기구까지 갖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것이 숨 쉬는 곳에는 그것을 삼키기 위해 다른 것이 동시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예측되고 계산되었듯이, 심지어 가장 상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다른 것을 제거하려고 든다. 예를 들어 곤충 중에서 맵시벌은 나중에 자신의 알이 먹잇감을 갖도록 특정한 나비 유충이나 그에 유사한 애벌레의 몸에 침으로 구멍을 뚫고 알을 낳는다. 자유롭게 기어 돌아다니는 애벌레에 의존하는 맵시벌은 1/8인치쯤 되는 매우 짧은 침을 갖고 있다. 반면에 애벌레를 고목 깊숙이 숨겨두는 벌에 의존하는 맵시벌은 고목 안에 닿기 위해 2인치 길이의 침을 갖는다. 전나무 열매에 사는 애벌레에 알을 낳는 맵시벌도 거의 마찬가지로 긴 침을 갖는다. 이로써 그 맵시벌들은 애벌레에까지 파고들어서 찌른 후 그 상처에 알을 둔다. 그 알에서 나온 것이 나중에 이 애벌레를 갉아먹는다(커비와 스펜스, 『곤충학 입문』). (105쪽∼10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고슴도치, 아르마딜로, 천산갑, 거북이, 오징어, 나무늘보, 청개구리, 벼룩
마찬가지로 추적당하는 것에게서도 그 적을 피하려는 의지가 방어적인 장치에서 명백히 표현된다. 고슴도치와 호저(豪猪)는 빽빽한 창을 공중에 내민다. 아르마딜로, 천산갑(穿山甲), 거북이는 이빨도 부리도 발톱도 접근할 수 없도록 머리에서 발까지 털로 뒤덮여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작은 것들 중에는 가재의 모든 종이 그렇다. 다른 것들은 물리적 저항을 통해 방어하지 않고 추적자를 속임으로써 방어한다. 그래서 오징어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주변에 퍼뜨릴 먹구름을 만드는 재료를 지니고 있다. 나무늘보는 자신을 이끼 낀 큰 가지로, 청개구리는 자신을 나뭇잎으로 보이게 하는 것처럼 무수한 곤충들이 자신들을 그 거주지로 보이게 한다. 흑인의 머릿니는 까맣다. 백인의 벼룩도 까맣지만, 그것은 유례없이 강력한 장치인 자신의 폭넓고 불규칙적인 뛰기를 믿는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들에서 예견되는 것을 우리는 예술적 충동에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어린 거미와 거미귀신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덫을 놓은 노획물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방어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에르 당드레 라트라일에 따르면, 누에나방은 전갈파리를 침으로 죽인다. 누에나방을 먹지도 않고 그것으로부터 공격받지도 않지만 그것이 나중에 자신의 둥지에 알을 낳아서 자신의 알이 크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에나방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예견에서 시간의 관념성이 다시 입증된다. 이것은 대체로 물자체로서의 의지가 언급되는 즉시 언제나 나타난다. 여기서 다루어진 관점에서는 다른 많은 관점에서와 같이 동물의 예술적 충동과 생리학적 기능들이 설명을 위해서 서로 도움이 된다. 이 둘에서 의지는 인식 없이 작용하기 때문이다.(107쪽∼108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쇼펜하우어의 탁월한 설명은 이후로도 코끼리, 말, 원숭이, 오랑우탄, 뱀, 여우 도도새에 관한 기가 막힌 설명들로 이어집니다. 동물 이야기는 대략 이쯤에서 그치고 쇼펜하우어가 들려주는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한 설명으로 살짝 건너가 보지요.
유기체는 그야말로 가시적으로 된 의지일 뿐
인간에게서 다른 동물들을 매우 능가하는 오성은 부가되는 이성(비직관적 표상 능력, 즉 개념 능력인 반성과 사유능력)에 의해 지원된다. 그렇지만 그 지원은 오직, 한편으로는 동물의 욕구를 훨씬 넘어서고 무한히 증가하는 인간의 욕구에 비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무기와 자연적 엄호의 전적인 결여와 크기가 같은 원숭이의 근력보다 뒤지는, 비교적 약한 인간의 근력에 비례한다. 동시에 그 지원은 도피에서 인간의 무능함에 비례한다. 인간은 달리기에서 모든 네 발의 포유동물보다 뒤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지원은 또한 인간의 느린 번식, 긴 유아기, 긴 수명에 비례한다. 이것들이 개별자의 확실한 보존을 요구한 것이다. 이 모든 큰 요구들은 지적 능력을 통해 충족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 능력이 인간에게 그렇게 뛰어난 것이다. (112∼113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이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얽힌 기나긴 여정을 서서히 마무리할 시간이군요. 결론으로 향하는 쇼펜하우어의 설명을 조금만 더 들어보지요.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과 조화
따라서 우리는, 이 해부학적 요소가 한편으로는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 따라서 종족 전체의 기본 유형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해부학적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연적 자연성질"로서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 형태의 변화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목적에 맞는 자연성질"이라고 부르며, 이로부터 뿔 달린 가축에게서 위 앞니의 재료가 뿔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 왜냐하면 낙타와 사향노루처럼 뿔 없는 반추동물만이 뿔 있는 것들에서는 없는 위 앞니를 갖기 때문이다. 여기 골격에서 설명된, 동물의 목적과 외적 생활 관계들에 대한 그 구조의 정확한 적합성뿐 아니라 동물의 내부 작용에 있는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과 조화는 다른 어떤 설명이나 전제를 통해서보다, 동물의 신체는 표상으로서 직관된, 따라서 뇌에 있는 공간, 시간, 인과성의 형식에서 직관된 자신의 의지 자체일 뿐이라는, 그래서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 객체성일 뿐이라는,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확인한 진리를 통해서 불분명할지라도 가장 잘 이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정 아래에서는 신체에 종속되었거나 신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종 목적을 위해, 즉 그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공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는 어떤 불필요한 것, 과도한 것, 결여된 것, 목적에 모순되는 것, 불충분한 것, 그 방식이 불완전한 것도 발견될 수 없고, 필요한 모든 것은 그 필요한 만큼 정확히 그곳에 있어야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장인, 작품, 재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극도로 완벽한 걸작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먼저 의도를 갖고 목적을 인식하고 그 다음에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물질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의욕이 직접적으로 목적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성취다. 그래서 먼저 억제되어야 할 이질적인 어떤 수단도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욕, 행위, 성취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116∼11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이제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마무리할 때입니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
나의 학설로부터 당연히,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자연, 즉 결코 속일 수 없고 천재처럼 순진한 자연은 자신을 꾸밈없이 표명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이며, 그 다음에 그것의 재료는 밖에서, 형식과 운동은 자신으로부터 조달하여 우리 눈앞에서 자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경험적으로도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라마르크의 천재적 오류」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명쾌한 설명을 듣고 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전공했던 앙리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가 왜 그토록 '획득형질의 유전 문제'를 두고 전전긍긍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문제야말로 과학과 철학의 애매한 경계에 걸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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