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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Investing

 

어떤 여성이 탁월한 미모와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당대의 저명한 여러 인물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그녀가 뛰어난 미술가들의 영혼을 뒤흔든 끝에 세기적인 명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몇몇 유명한 그림에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음악가와 건축가와 문학가와도 두루 함께 살아 보기도 했다면? 그것도 세 번에 걸친 정식 결혼을 통해서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말러였습니다. 그녀가 미술 작품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였습니다. 우선, <바람의 신부>라는 유명한 그림부터 간단히 살펴 보지요. 그녀의 '바람 같은 삶'이야말로 '바람'과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람의 신부> 혹은 <폭풍우>, 1914년

 

폭풍처럼 강렬한 사랑이 격정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오스카 코코슈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였으며, 특유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였습니다. <바람의 신부> 또는 <폭풍우>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코코슈카는 가슴에서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감정을 거친 붓 터치를 통해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이 유독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그림 속의 남녀 모델이 바로 화가 자신과 그가 격정적으로 사랑했던 연인 알마 쉰들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마 쉰들러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에밀 야곱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으며, 타고난 미모와 지성으로 숱한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스물세 살의 꽃다운 나이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40대의 노총각이었던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하였고, 말러가 사망한 이후에는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했으며, 그와 헤어진 이후에는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한 때 이 여인과 연인관계였습니다.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

 

그렇습니다. 알마 말러는 화가의 딸이자 작곡가의 아내였으며, 자신의 직업 또한 '작곡가'였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음악 도시 빈을 대표하는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떨친 천재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의 첫 남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 뒤에 말러라는 성이 따라붙지 않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이름은 알마 쉰들러였습니다. 그녀는 1879년 당대의 저명한 화가였던 에밀 야콥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말러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공연 감독 막스 부어카르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 그리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 가운데 클림트는 알마 쉰들러의 첫 키스를 차지한 남자로 알려졌으며, 그 덕분에 그녀는 (뜻밖이면서도 영광스럽게)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The Kiss (Lovers), 1907–1908.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1902년 3월 9일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합니다. 무려 19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결혼이었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작곡가의 꿈을 접고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지만, 첫 딸이 죽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깊은 관계에 빠집니다. 말러도 이 사실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씁니다. '천인 교양곡'으로도 불리는 교향곡 8번은 바로 그 무렵에 그녀를 위해 쓰여진 곡이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1911년에 구스타프 말러가 불과 51세에 죽자, 알마 말러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두 번째로 결혼하지만 첫 남편과 사별한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였습니다. 그로피우스와 재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로 지낸 또다른 남자가 천재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였습니다. 이 화가는 알마 말러가 건축가와 재혼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

알마와 헤어지자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진해서 입대했고, 이내 전쟁터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되돌아 옵니다. 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군대에 갔다가 몸까지 다친 셈이었습니다. 그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해 '알마를 닮은 인형'을 제작해서 함께 생활할 정도로 알마 말러에게 집착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오페라 공연을 갈 때에도 그 인형의 자리를 예약할 정도였다니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많은 편지를 썼는데, 70번째 생일날에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나의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이오. 당신의 생일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덧없는 달력의 시간에 나를 묶어놓지 말라'고 하오. 대신 시인을 찾아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했으며 서로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후세에 우리들의 살아있는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이야기를 전해 줘요. 우리가 서로에게 불어넣은 그 뜨거운 열정과 비교되는 사랑은 없었으니까.

당신의 오스카.

ps :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


그토록 끈질겼던 코코슈카의 구애를 뿌리친 끝에 시작된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로피우스의 잦은 해외 출장과 새로 태어난 아들의 '친부 논란'등이 문제였습니다. 그때 친부 논란을 일으킨 남자가 바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프란츠 베르펠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공공연히 알마의 애인으로 소문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청산한 알마는 무려 10년 동안 베르펠과 동거하다가, 1929년에 이르러 그와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 뒤에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내내 함께 합니다. 유태인이었던 부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녔고, 알마는 남편과 함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프란츠 베르펠(1890∼1945년)

 

 

여담이지만, 몇 년 전에 저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알마 말러와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와 입을 맞추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빈을 떠날 때 마침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날렵한 커피잔이 눈에 띄었고, 오랫동안 그때 집어 든 그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지요.

 

 

벨베데레 궁전(출처 : 위키 백과)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 <유디트> 말고도 에곤 실레의 걸작 <죽음과 소녀>, <포옹>등이 소장되어 있다.

비록 <바람의 신부>는 없지만 오스카 코코슈카의 다른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키스> 속의 그 여자가 '말러의 부인'이었다는 얘기는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것 같지만, 그녀가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의 주인공과 동일 인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게는 몹시 낯선 이름의 소설가에 불과했던 프란츠 베르펠이라는 사람이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줄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부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 클리프턴 페디먼, 『평생독서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최근에 저는 알마 말러에 관한 또다른 놀라운 사실 하나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자주 찾는 이웃님의 유튜브 동영상 덕분이었는데요. 그 영상은 1943년에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흑백영화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이었는데, 그 영화의 원작을 쓴 작가가 놀랍게도 프란츠 베르펠이었던 것입니다. 그 유태인 소설가는 1938년 자신의 아내 알바 말러와 함께 나치의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어 피신하던 중 프랑스의 어느 산간마을에 숨어들어 2년 동안이나 은신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마을 루르드에서 전해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숨겨준  마을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심정으로 <성 베르나데트 수비루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썼으며, 그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 <베르나테트의 노래>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1943년에 만들어진 그 영화는 제1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제1회 골든 글로부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알바 말러와 프란츠 베르펠이 한때 나치의 박해를 피해 무려 2년 동안이나 꼭꼭 숨어 지냈던 그 산골 마을은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소설과 영화의 배경으로도 유명하지만, 지금은 매년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는 성모 발현지로도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바람의 신부 알바 말러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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