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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Investing

 

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오늘은 몹시도 두꺼운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저도 언제부턴가 두꺼운 책들을 조금씩 넘보기 시작했더랬습니다. 아마도 제가 태어나서 거의 맨 처음으로 도전했던 두꺼운 책들은 지금 되돌아 보더라도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책이었던 듯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으로 무모한 도전에 나섰던 두꺼운 책들은 무려(!)『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몽테뉴 수상록』,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둑으로 치자면 겨우 5,6급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되는 초급자가 프로 기사에게 맞바둑을 두자고 덤빈 꼴이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상당히 기나긴 '특별 무소속 기간' 동안 이런 책들과 거친 씨름을 벌이기로 작정을 했더랬습니다. 비록 자세는 영 볼품없었지만 말이지요. 1970년대의 엄혹한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탓에 제게 두발 자유화는 그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입시가 끝나고 입학이 다가올 때까지 겨울 내내 완전 무방비 상태로 무럭무럭 자라도록 내버려둬도 두발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까까머리에서 조금 벗어난 듯한 어중간한 모습으로, 대학생으로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그런 어설픈 시골 총각의 머리 모양새로(한 마디로 말하자면 '촌놈'으로) 저는 용감하게도 '트로이아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던 셈입니다. 군불을 넉넉히 지핀 시골집 온돌방에 배를 깔고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엎드렸다 누웠다를 반복하면서 말이지요.

 

입시 과목과는 전혀 다른 책들인지라 어쨌든 꽤 여러 날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오랫동안 저에게 잊지 못할 추억들을 남겨 주었습니다.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온갖 흥미로운 얘기들이 그 당시에 제게 얼마만큼 재미있게 다가왔었는지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순 없습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온갖 고대의 이름 모를 신들과 지명들과 인명들만 하더라도 제겐 얼마나 벅찼는지 모릅니다. '이걸 도대체 언제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순간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었다면 그 당시에는 독서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데 방해될 만한 요소는 일부러 찾을래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까요.



마법상자 같은 TV라고 해봐야 기껏 서너 채널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밤 시간에만 볼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선 신문조차 구독하는 게 없었고, 흔해빠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그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환경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그 두꺼운 책들을 꽤나 오래도록 붙들고 읽었더랬습니다. 그 책들을 정말로 끝까지 다 읽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아마도 완벽하게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독후감까지 끄적거려 놓은 게 지금까지도 남아 있긴 합니다.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무모한 도전이 내심 흐뭇하기도 하고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나이에 도대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런 책들을 붙잡고 그토록 낑낑댔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제게 '두꺼운 책들'은 그저 호기심이나 의무감의 대상이었지 처음부터 흥미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던 게 분명했습니다. 숱한 걸작 소설들 가운데 하필이면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선택한 이유 또한 별 다른 건 딱히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집에 남자 형제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서도 '두꺼운 책들'에 대한 괜한 욕심이 다시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찾아 읽은 책들이 (다시) 『몽테뉴 수상록』, 홉스의 『리바이어던』,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허먼 멜빌의 『모비딕』, 스탕달의 『적과 흑』, D.H.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괴테의 『파우스트』 등이었습니다. 그 무렵에 플라톤의 『국가』,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등도 읽었습니다. 얇은 책들도 더러 읽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보잘 것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왠지 저는 그 나이에 그다지 썩 어울리지 않게(?) 웅편거작들에 꽤나 욕심을 냈던 것 같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한 이후로는 아주 오랫동안 이상한 담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책과 나 사이에 쌓인 담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저절로 계속 높아만 갔습니다. 이래저래 '사회생활'로 아주 바빴던 탓도 있었고, 책 없이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들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릅니다. 술을 마시는데 쏟아부은 시간만 하더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말이지요. 그런 시기에 무슨 이름난 대작들을 읽는다는 건 아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제가 읽은 '장편'이라고 해 봐야 이문열의 『 삼국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한때는 『소설 목민심서』, 『소설 동의보감』까지도 괜스레 대작으로 여길 정도였지요. 이때의 독서 편력은 제겐 이를테면 '중세의 암흑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읽기에 살금살금 빠져든 게 대략 2003년 무렵부터 였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너무나 흥미롭게 읽혔고, 그 여세를 몰아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물론이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쓰인 작품들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에 세계사 책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쓴 아주 오래된 고전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갑자기 '르네상스'를 맞이한 기분마저 느껴졌습니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를 만나고 나니 제가 새로이 만나야 될 흥미로운 인물들이 책 속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를 만나고, 키케로와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를 만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를 잇따라 만났습니다.




그러고 나니 두꺼운 책들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책들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줄어드는 대신에 책 속에 담긴 묘한 비밀들이 차츰 엿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다름아닌 '텍스트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는데,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차츰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나 이야기'를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단테의 『신곡』속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만 만나는 게 아니라, 트로이아 전쟁에서 맹활약하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를 만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몽테뉴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톨스토이의 소설 속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다시 만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차츰 철학으로도 번졌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속에서 무수한 고대 철학자들을 만나게 되니 자연스레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 철학자 열전』을 찾아 읽게 되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쇼펜하우어와 헤어지자 말자 이내 니체를 찾게 되고, 니체의 작품들 속에서 다시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들과 철학자들을 다시 만나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극한까지 치달았던 건 무엇보다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만났을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무런 사전 준비작업도 없이 무모하게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러 곧장 뛰어든 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이미 소개받은 적이 있었고, 그 풍요로운 『월든』 속에서 다시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오비디우스, 소포클레스는 물론 몽테뉴,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허먼 멜빌 등등을 다시 만났고, 그런 교유 덕분에 비로소 저는 어른들이 읽는 『걸리버 여행기』와  『로빈슨 크루소』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런 얽히고 설킨 만남 덕분에 저는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어렵사리 그를 만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웅편거작에 대한 공포심'이 거의 다 사라진 듯한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난관마저 뚫고 나왔는데 내 앞을 가로막을 책들이 더이상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싶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와락 다가왔다고나 할까요.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 셈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읽기를 배운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 것이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P150)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나는 우리 콩코드 땅이 배출한 인물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비록 그들의 이름이 이곳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듣고도 끝내 그의 저서를 읽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플라톤이 바로 우리 마을 사람인데도 내가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가 바로 옆집 사람인데도 그의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그 말의 예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의 영원불멸한 지혜를 담은 책이며 바로 옆 선반에 놓여 있는데도 나는 그 책을 거의 들추지 않는다.(P154)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나서는 '두꺼운 책들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간에 모조리 제거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마음 속에만 담아 왔던 대작들을 향해 겁없이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덥석 붙잡은 게 『전쟁과 평화』였습니다. 이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통해 '무모한 용기'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를 충분히 맛본 터여서 『전쟁과 평화』는 '전쟁 보다는 평화 쪽으로' 아주 순조롭게 풀려나갔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트로이아 전쟁에서 뛰어난 장군이자 외교관이자 웅변가로 맹활약했던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를 그린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대한 오마주이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에 대한 '러시아 민중들의 저항'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다면, '최후의 그리스인'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얻은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이들 두 작품과는 사뭇 결이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야말로 고대의 무수한 전쟁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평화로운 시대를 살다 간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불굴의 용기와 지혜를 발휘한 위대한 인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플루타르코스의 탁월한 문장력에 대한 명성은 이미 『몽테뉴 수상록』을 통해서도 눈과 귀가 아프도록 익히 들어왔던 터였고, 발췌 번역본인 천병희 선생님의『플루타르코스 영웅전』까지 읽었던 터라 '영웅전 전집'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더랬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과연 명불허전이었습니다. 그토록 방대한 책을 단숨에(?) 완독하고 나서 곧바로 다시 집어들고 나서 (두 번째인 만큼) 아주 느긋하게 즐기면서 재독했던 일은 다른 책들에서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고 나서도 왠지 모르게 '두꺼운 책들'에 대해 뭔가가 모자라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건 순전히 셰익스피어 때문이었습니다. 인류 최고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이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을 읽지 않고는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을 도저히 메울 길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제가 셰익스피어를 미리 만나지 못했던 일을 가슴 깊이 통탄했던 일들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셰익스피어를 미룰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랄프 왈도 에머슨이 쓴 『위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이미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법 자세히 소개 받은 터였고, 에머슨이 남긴 명언까지도 심심찮게 떠올렸던 터였습니다.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셰익스피어를 읽고 나니 아주 잠깐 동안은 '두꺼운 책들에 대한 갈망'이 일순 가시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착각일 뿐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에 나오는 주인공인 23세의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위스의 다보스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인 베르크호프에서 자주 겪었던 '수은주의 변덕'을 닮은 꼴이었습니다.

 

10월도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시작되었다. 그 자체로는 완전히 겸손하고 소리 없는 시작이다. 신호도 표시도 없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바람에 눈을 부릅뜨고 주의하지 않으면 이를 쉽사리 놓쳐 버리게 된다. 시간에는 사실 눈금이 없고, 새로운 달이나 해가 시작될 때 천둥이 치는 것도 아니고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 예포를 쏘거나 종을 치는 것도 인간뿐이다.(434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상권』, <제5장_수은주의 변덕> 중에서 

 

 

그랬습니다. 셰익스피어를 때론 힘겹게, 때론 너무나 가슴이 벅차 오르는 희열로 신나게 읽을 때도 있었으나, 현실 속의 저는 아직까지도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오르지 못한 터였습니다. 아,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곧장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마의 산』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런 후에는 소설계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찰스 디킨스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들인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을 내처 읽었습니다.



 

아... 그런데...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너무나 재미있으면서도 예상 외로(?) 분량 또한 엄청났습니다. 도대체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얼마나 긴 걸까? 이렇게 긴 데도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어도 좋단 말인가?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로 꼽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생각보다 그리 많이 읽지 않는 걸까? 게다가 대다수의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찰스 디킨스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황폐한 집』은 또 어떻고? 말 그대로 작품 자체를 '황폐한 집'으로 취급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이게 꼭 찰스 디킨스만의 문제일까?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니, 그렇다면 마르셀 푸르스트의 그토록 악명 높은 작품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도대체 얼마나 긴 걸까? 여기에 대한 합리적인 공통의 비교 잣대는 없을까?

 

이런 얄궂은 생각들이 마구 스쳐 지나갔더랬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한 번쯤 시도해 봤으면 싶었던 '나만의 작업'을 슬금슬금 시작했습니다. 굳이 이 작업에 대해 따로 제목을 붙이고자 한다면 '이름난 웅편거작들의 작품 길이에 대한 소고'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쎄, 이런 말은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니 그냥 대충 넘어가지요. 아무튼 재미삼아 만들어 본 그 결과물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어쨌든 이 도표를 만들 때 '나만의 독창적이면서도 자의적인 판단'이 상당히 많이 개입됐음을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이런 표는 결국 '나 자신의 과거의 독서 경험과 미래의 독서 계획'을 일정 부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 점을 미리 충분히 확인한 뒤에 이 표를 살펴야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을 듯합니다.

 

1. 이 표는 이름난 걸작들을 똑같은 잣대를 써서 '물리적인 작품의 길이'를 서로 비교해 보는 게 주목적이다.

   그래서 똑같은 판형으로 출판된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총 275권)'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2. 여러 작품을 '합본'한 경우는 최대한 배제했다.

    예),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지혜』(1,023쪽),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향연』(824쪽),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정략론』(665쪽), 카프카의 『성/심판/변신』(610쪽) 등

 

3. 여러 작품을 모은 '합본'이지만 (너무 중요한 작가여서) 예외적으로 포함시킨 작품은 딱 둘만 넣었다.

   예), 셰익스피어의 다섯 작품을 모은 책(655쪽), 니체의 다섯 작품을 모은 책(1,030쪽)

 

4. 단일 작품으로서의 통일성이 부족하거나, 비평가들로부터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 작품들은 제외했다.

   예) 『아라비안나이트』(전5권, 5,336쪽), 『솔로몬 탈무드』(810쪽), 『그림동화전집』(1,344쪽) 등

 

5. 분량이 방대한 작품을 중심으로 길이를 비교하는 게 주목적이어서 '인위적인 하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널리 알려진 세 작품(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위대한 유산』)이 모두 560쪽이었다.

 

6. 대작이지만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에 아예 없는 작품들은 제외되었다.

   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등

   또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526쪽)는 축약본의 번역본이어서 제외했다.

 

7. 지나치게 어려운 작품이거나 지나치게 대중적이다 싶은 작품은 일부러 제외했다.

   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770쪽),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686쪽), 밀턴의 『실낙원』(644쪽),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332쪽) 등

 

 

이렇게 어렵사리 비교한 결과를 좀 더 시각적으로 '한 눈에' 살펴볼 수는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챠트로 만들면 되니까요.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림인가? 인류의 천재들이 빚어낸 불멸의 걸작들이 이 챠트 하나에 다 담기다니!

 



까마득한 옛날에 제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혹은 『몽테뉴 수상록』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먼 미래에는 이런 그림까지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까마득한 옛날에 어느 책에서 얼핏 스치듯이 보았던 서머싯 몸의 <세계 10대 소설 목록> 가운데 내가 읽은 작품이 단 하나, 『까라마조프 형제들』밖에 없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저를 여기까지 몰래 이끌고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에서야 문득 뒤돌아 보니 <세계 10대 소설> 가운데 두 작품만 빼놓고는 다 읽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어쩌면 제가 만드는 이런 영상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실제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덥석 붙잡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책들이 아직까지도 어떤 독자에게는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보다 부담이 훨씬 덜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으로 살짝 방향을 바꿀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시도가 누군가에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측정 불가능한 미래의 자그마한 가능성들이야말로 이런 영상을 보시는 분들로부터 제가 진정으로 바라마지 않는 가장 진지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일 테니까 말이지요. 




프란츠 카프카는 책이 얼음을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라면 왜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하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랄 때는 '얼음'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더랬습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는 데 시간을 보냈지 얼음을 깨느라고 애를 쓴 건 아니었지만 말이지요. 어릴 땐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일만큼 신나고 기분 좋은 일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얼음 위에서 꽈당 미끄러질 때도 있었지요. 얼음이 너무 매끄러우면 너무나 쉽게 벌러덩 넘어지는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얼음을 깨트려야 할 때도 가끔씩은 있었습니다! 얼음 아래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를 잡을 때였지요!

 

그렇습니다. 물고기를 잡을 때 가장 필요로 하는 무기가 바로 도끼였습니다! 도끼만 있으면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도 얼음을 아주 쉽게 깰 수 있었습니다! 얼음이 너무 단단하다거나 너무 매끄럽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요. 얼음은 결국 얼음일 뿐이니까요. 그 얼음을 깨트릴 도끼는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얼마만큼 훌륭한 도끼로 얼마만큼 두꺼운 얼음을 깨트릴 것인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입니다. 




저는 몹시도 두꺼운 책들이 두꺼운 얼음을 깨트리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이토록 두꺼운 책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무슨 수로 '얼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들을 지닌 『마의 산』 같은 데를 오를 생각이나 했겠으며, 저토록 방대한  외관을 자랑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속으로 불쑥 걸어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제 다시 두꺼운 책을 붙들 시간입니다. 저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이런 영상을 만들고 있을까요? 이런 책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못내 그립고, 이런 두툼한 책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못내 고맙기 때문입니다. 이  영상에 담긴 책들이 제게 안겨준 즐거움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지만, 그들이 제게 고통을 안겨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 그러니 어찌 제가 틈날 때마다 이런 책들을 거듭 보듬고 쓰다듬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것으로 두꺼운 책들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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