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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친구들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 *

찰스 디킨스는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중의 한명이지요.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가가 셰익스피어라면, 찰스 디킨스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스물다섯 살 때 갑자기 '불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 지금까지도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지요.

 

셰익스피어를 두고 어느 한 작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디킨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하는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미 크리스마스를 새롭게 창조한 인물로까지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이나 유아를 위한 작품을 쓴 작가는 아니지요.

 

그의 작품은 비교적 읽기가 쉽기 때문에 무척 대중적인 작가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진지한 예술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디킨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때로는 '만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특징과 용모가 매우 부풀려지고 희화화 되곤 하지만, 그런 방식이야말로 디킨스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인물 조형 방법이자 인생을 폭로하는 중요한 장치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런 대목들을 놓치게 되면 그를 자칫 오해하기 쉽지요.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핍)


디킨스의 작품 속에는 고아가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랑자나 죄수들을 비롯한 버림받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등장합니다. 그건 바로 작가 스스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그가 맛본 어린 시절의 고독과 절망, 굴욕과 비참함이 한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의 불행을 아주 심오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때때로 도스토예프스키와 거의 동급으로 평가받기도 하지요. 하지만 디킨스의 작품이 러시아 작가보다는 훨씬 덜 심각하며,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등 분위기도 훨씬 밝은 편입니다. 무엇보다 디킨스의 작품은 종교, 과학, 정치, 예술 등에 대해서 아주 초연하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디킨스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인 181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잠깐 동안은 해군 경리국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안정적인 수입 덕분에 매우 행복한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꾸만 빚을 져서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목가적인 시대'는 갑자기 끝나버렸고, 가족들이 모두 런던으로 이사를 떠난 뒤 홀로 '하숙'을 하며 몇 주 더 학교를 다녔던 디킨스는 이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짐 하나만 가지고 홀로 승합 마차를 타고 가족을 찾아가는 여정은 작가에게 깊은 상처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우울한 여행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눅눅한 지푸라기 냄새도 그 기억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지푸라기에 싸인 채 발송된 것이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괴롭게 술회했다. "승합마차 좌석에는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혼자서 쓸쓸한 기분에 젖어 샌드위치를 씹었다. 가는 길 내내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인생은 내가 기대하던 것보다 축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17쪽)

 

디킨스가 홀로 런던에 도착해 보니 가족은 '누구라도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칙칙하고 누추하고 초라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나날이 비참해졌고 독이 오른 채권자들은 집으로 몰려와 모욕적인 말을 마구 퍼부어댔지요. 어린 디킨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재도구를 골라 전당포에 내다파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열두 살이 된 디킨스는 결국 강기슭에 위치한 어두침침하고 쥐들이 우글거리는 구두약 공장에 고용되지요. 여기서 겪은 경험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그는 나중에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토록 쉽게 내버려지다니……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았다. 비범한 재능을 가졌고 머리 회전도 빠르며 의욕이 넘치고 섬세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처받기 쉬운 아이였는데. 그런 나를 어디 평범한 학교에 들여보내 주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든가-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12살 때 구두약 공장을 다니던 시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작가의 실제 경험 그대로를 담았다.)

 

이때 그가 경험한 공장 생활은 그의 작품들뿐 아니라 그의 삶에도 오래도록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그토록 어린 나이에 육체노동을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새겨진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던지는 몇 해 전에 개봉된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에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불행은 구두약 공장 생활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급 6∼7실링의 수입으로는 하숙비와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였는데, 그나마 버티던 아버지가 빚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런 비참함을 버텨냈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6마일을 걸어 마샬시 감옥에 가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함께 '온갖 시름을 다 잊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토록 눈물겨운 이야기는 존 포스터가 쓴 방대한 분량의 《디킨스 전기》(1872∼1874)를 통해 자세히 살필 수 있지만, 디킨스가 쓴 자전적 전기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찰스 디킨스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구두약 공장을 다닐 때의 역경을 그린 대목은 <11장. 힘겨운 홀로서기>에 나오는데, 그 가운데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1주일에 6,7실링 가지고는 모자랐다. 그래도 나는 온종일 창고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1주일을 살아가야만 했다. 월요일 아침에서 토요일 밤까지, 누구의 충고도 없었고, 어떠한 조언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어떠한 종류의 지원도 받지 못한, 거짓도 위선도 없는 곳이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기에 내 생활을 꾸려갈 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린 내가 달리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겠는가? 아침에 머드스톤 앤드 그린비 상점에 가는 도중, 빵집 앞에 내놓은, 반값에 파는 오래된 과자를 먹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점심 먹을 돈으로 과자를 미리 사먹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점심을 거르거나 롤빵 한 개, 아니면 푸딩 한 조각으로 요기를 했다.(190∼191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11장. 힘겨운 홀로서기>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어릴 때 겪는 '온갖 고생담'은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아픈 이야기들로 빼곡하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어린 시절의 체험들이 도대체 얼마만큼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기에 이토록 실감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까 싶은 생각에 애처로운 생각이 들면서도 작가에 대해 감탄을 거듭하며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태어나서 고작 12살때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벌써 이 소설이 200쪽을 훌쩍 넘어갈 정도이니, 어린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만 하더라도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을지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지요. 주인공이 갓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요.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오로지 '작가 찰스 디킨스의 드라마틱한 실제 삶'에 거의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크나큰 오해도 없을 듯합니다. 물론 이 방대한 소설의 상당 부분이 작가의 실제 삶을 깊게 투영한 건 맞지만, 그런 이야기가 소설에서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요. 특히나 20대 중반부터 갑작스레 찾아온 작가로서의 놀라운 성공 과정이나 벼락출세한 작가의 화려한 모습들은 소설 속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완성할 때만 하더라도 작가의 나이는 고작 37세였고, 소설에 1인칭으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소설 속 '지금'의 나이 또한 겨우 30대 중반쯤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비교적 어린 나이인 20대 초반에 사랑하는 도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릴 때쯤이면 이 소설은 벌써 740쪽을 훌쩍 지나면서 서서히 종반부로 치닫게 되지요.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다루는 시기가 이처럼 아직 한창이나 다름없는 나이인 30대 중반으로 한정된다고 해서 작품 내용마저 철없는 10대와 20대 시절의 이야기에 치우쳐 있으리라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30여 년에 걸친 짧은(?)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 속에는 결코 적잖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주변에 머물면서 저마다 엄청난 사건들과 엮이면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더러는 아주 오래도록 살아 남아서 뒤늦게나마 주인공인 '나'와 '눈물겨운 상봉'을 겪기 때문이지요. 지난 날에 대한 온갖 추억과 회한과 상념들을 두루 떠올리면서 말이지요.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펜을 놓기 전에 다시 한 번 ㅡ 마지막으로 떠올려 본다.

(……)

빠르게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뚜렷이 보이는 얼굴은 누구일까? 아아, 그렇다, 이 얼굴들! 내가 속으로 그것을 물어보면 모두가 일제히 나를 뒤돌아 본다!(1006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64장. 마지막 회상> 중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여느 이름난 장편소설들과는 사뭇 분위기부터 다릅니다. 대개 걸작으로 평가받는 '장편소설'들이 다루는 주제들부터 묵직하기 마련이고, 거대한 건축물을 마주 대하듯 '외관'에서부터 어떤 압되되는 분위기를 지니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도 찰스 디킨스를 무척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이 두 작가의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와 『데이비드 코퍼필드』만 비교해 보더라도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그러나 이 두 작품 속에서도 몹시 닮은 점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두 작품에 똑같이 등장하는 '주연급 청춘남녀가 철없이 저지르는 무대뽀 야반도주 사건'입니다. 사실 그들 두 커플은 자세히 살펴보면 용모나 성격까지도 쏙 빼닮았습니다. 심지어 두 여주인공이 도주할 때 남기는 '급하게 갈겨 쓴 편지'까지도 닮았습니다. 러시아 소설에선 오드리 햅번이 배역을 맡았던 나따샤와 돌로호프가 그 주인공이고, 영국 소설에선 에밀리와 스티어포스가 그런 역할을 떠맡았는데, 자세히 모르긴 해도 톨스토이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지 싶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에는 숱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작가가 밝히고자 애썼던 '삶의 의미'에 언제나 전쟁과 평화, 역사와 우연, 종교와 정치 등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끈덕지게 들러붙었으나,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서는 그런 무거운 요소들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지요.


(『데이비드 코퍼필드』 삽화, 바닷가 뱃집에 패거티 씨와 에밀리 등이 오손도손 살고 있다.)


 

이 소설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과거에 대한 회상'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너무나 정확하게 되살려 내는 주인공의 비상한 기억력과, 그걸 너무나 매혹적으로 기술하는 작가의 솜씨일 듯합니다. 이 작품이 아무리 전기적인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이 정도로 세밀하게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을 비디오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그려내고, 그런 회상 장면 자체까지도 놀랍도록 매혹적인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눈앞을 스치듯 사라져가는 수많은 광경들과 감각들, 다시 말해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우리의 뇌리에 저장되는 기억들을 이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은 작품을 일찌기 저는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소설 덕분에 저 역시 오래된 옛 추억들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되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실로 오랫동안 '낡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쓴 채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던 온갖 자질구레한 기억의 잡동사니들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얼마나 자주 먼지를 털고 불쑥불쑥 솟아났는지는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기적적으로 기억의 심연 속에서 한 순간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그때마다 저는 그런 기억들을 어떤 식으로든 붙잡아 두기 위해서 한참이나 그걸 노트에 끄적거려야 했습니다.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였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발견하고 나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 기억도 있습니다. 주인공 데이비드가 심리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받을 때마다 그는 '현실에서 비롯된 꿈'을 잠자리에 들어서도 내내 이어가는 버릇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했던지 '그래, 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간 내면 심리에 대한 탁월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천재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두고 얼마나 '자신의 경험'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거듭 이 소설을 감탄하며 읽었을지도 능히 짐작됩니다.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담긴 이야기는 '기억의 본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독자들한테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디킨스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계급과 성(性)의 차이에서 오는 '관계의 불안정'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인 여주인공 에밀리를 유혹하는 스티어포스, 성녀 같은 아그네스에게 흑심을 품은 우라이아,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관능적인 도라에서 정숙한 이성 아그네스에게로 차츰 관심이 옮겨가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요.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오래 전부터 그 명성 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쉽게 손에 잡히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 중에서도 최고라고 격찬한 작품이었으니 도대체 얼마만큼 대단한 작품인가 하는 궁금증이 늘 뒤따라 다녔지만,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작품에서는 이 소설을 읽고픈 열망을 한 순간에 싹 달아나게 만드는 문장이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떡하니 등장하니 말이지요.


정말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어느 유명한 마술사 이름과 똑닮은 제목을 지닌 이 특별한 작품은 가끔씩 마술을 부리듯 독자들을 확 끌어당길 때도 없진 않았습니다. 지난 2008년 느닷없이 들이닥친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전세계가 공포에 휩싸였을 때 미국 의 워싱턴 포스트에서 작금의 경제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받은 적이 있었는데, 온갖 이름난 경제 서적들을 다 제치고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유일하게 복수로 추천을 받았다는 깜짝뉴스가 떴으니 말이지요.


더군다나 그 책을 추천한 인물이 세계적인 대부호 빌 게이츠와 경영 구루로 널리 인정받는 피터 드러커였으니 다들  그 뉴스를 우스개로 치부할 수도 없었을 테지요. 그 두 사람이 이 책을 추천한 까닭은 바로 작품 속 인물인 미코버가  데이비드 코퍼필드에게 건넨 진심어린 충고 때문이었습니다.


"너도 알겠지만, 한 해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19파운드 19실링 6펜스면 결과는 행복이고, 한 해 수입이 20파운드인데, 지출이 20파운드 6실링이면 결과는 비참하지."


톨스토이는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내 친구”라면서 디킨스를 19세기 최고의 문호라 평하고 디킨스 초상화를 서재에 걸어 놓을 정도로 존경했다고 하지요. 그가 디킨스의 작품을 "영문학의 백미"라고 칭송한 것도 작가 특유의 옹골차면서도 눈물겹도록 놀라운 이야기 솜씨 때문이었습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장편소설이다. 아무리 세계 걸작으로 이름 높은 작품이라도 이 정도로 길면 두세 군데는 이야기가 느슨해지기 때문에, 독자는 지루해도 다음에 올 절정을 기대하며 꾹 참고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러한 곳이 전혀 없다. 어느 부분을 골라 읽어도 독특한 재미가 있고,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에 이끌려가는 게 아니라 뒤쫓아 가는 것이다. 늘어지는 곳 없이 팽팽하게 조여진 소설, 이것이 이 작품이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까닭이다. 인생의 고뇌와 비통을 날실로 삼고, 오락성과 환희를 씨실로 삼아 작품 전체를 옹골지게 엮어냈기 때문이며, 눈물과 더불어 웃음이 절묘하게 얽혀서 혼연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1109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생애와 문학> 중에서


이제 『데이비드 코퍼필드』와도 다시 작별할 시간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 가운데 꽤나 많은 사람들을 저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듯합니다. 가장 먼저 페거티와 그의 오빠가 떠오릅니다. 쌀쌀맞던 의붓아버지 머드스톤과 그의 누나도. 학창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스티어포스와 트레들스도. 페거티 씨네 뱃집에서 의좋게 살았던 에밀리와 햄과 거미지 부인도. 구두약 공장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함께 한 미코버 부부도. 5박 6일 동안의 고난의 행군 끝에 만난 대고모 트롯우드도. 캔터베리의 대성당 근처에 살았던 우라이아 힙과 아그네스까지도 벌써 그립습니다. 아직도 사전 편찬에 계속 몰두하고 있을 것만 같은 스트롱 박사 부부도 그립고, 도라와 집(애완견 이름)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스티어포스 부인과 로사 다틀과 하인 리티머는 어떻게 생겼을까. 에밀리의 친구 마사와 미스 모처의 실제 모습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트레들스의 아내가 된 소피와 여러 발랄한 처제들까지도...

 

이제는 그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모두들 부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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