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를 면밀하게 진단한 책이다. 바버라 F. 월터의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와 같이 읽으면 좀 더 깊이 있는 독서가 가능하겠다. 두 책 모두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습격을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신호(그것도 아주 위험한 신호)로 읽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책의 원제인 <소수의 폭정(Tyranny of the Minority)>은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을 경고한 알렉시 드 토크빌과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주장을 뒤집어, 다인종 민주주의 실험을 방해하는 정치적 소수의 지배를 신랄하게 표현한 것이다.
지은이인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각각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정치 변동을 연구하는 정치학자들이다. 미국 안으로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부터 2020년대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 밖으로는 1934년 2월 극우파의 프랑스 국회의사당 습격부터 21세기의 페루와 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풍부한 사례를 명확한 논점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비교정치학적 연구를 대중화한 좋은 사례다.
지은이들의 논점을 요약하면 이렇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인민을 대리하는 정치 엘리트가 ‘충직한 민주주의자’로서 행동해야 한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선거에서 패배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유지하려고 폭력에 의지해서는 안 되며, 극단주의자와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힘을 얻는 쪽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에 동의하는 척하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보전하려고 극단주의자들과 손을 잡는다. 문제는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극단주의자 들을 떼어놓을 내적 동기와 외적 강제 모두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은이들에게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주로 공화당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갈수록 협소해지는 공화당의 입지를 역전할 방안을 백인우월주의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충직한 민주주의자로 행동할 내적 동기가 거의 없다. 또한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나온 여러 타협의 결과가, 즉 지은이들이 ‘반다수결주의 제도’라 부르는 각종 제도적 문턱(폐쇄적인 의회[상원], 인민의 수에 비례하지 않는 선거인단, 극히 보수적인 대법원, 비민주적인 선거제도 등)이 (비록 조금씩 개선되기는 했어도) 미국의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외적 강제를 봉쇄한다.
바버라 월터와 마찬가지로,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시민들의 연대와 운동, 엘리트 계층을 향한 압력에서 민주주의를 갱신할(또한 월터가 바라는 대로 ‘2차 내전’을 예방할) 가능성을 기대한다. 이들 모두 민주화가 ‘기나긴 혁명’이며, 얼마든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안다. 문을 닫아놓는 게 이득인 문지기를 언제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는 이론이 아니라 정세가 결정하기 때문이다(우리로 치면 “국민의힘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아이디어를 준비해놔야 한다는 지은이들의 목소리는 귀담아 들을 일이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한국은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때 “미국이 생각했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안정적 조합은 남한과 대만이라는 두 반쪽 국가에서만 가능(<냉전의 지구사> 648쪽)”했으나, 미국과 한국 모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안정적 조합’이라는 희망에 커다란 금이 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은이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트럼프가 재선됐고, 한국에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들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고 있다. 지은이들의 제안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사회대개혁 비상행동과 같은 시민운동 연대체가 투쟁에 함께해온 시민들과 연합을 구성해, 민주당과 같은 현실정치 세력이 진보적 의제를 채택하도록 견인해야 한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던가, 그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목소리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계속 “나중에”를 외치면, 민주주의 자체가 나중이 된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그것만은 바라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