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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은 冊, 나를 찾아 온 冊
  • 난 당신이 좋아
  • 김병년
  • 9,000원 (10%500)
  • 2010-12-29
  • : 2,701

한 소년이 호숫가에 놓여 있던 조각배에 무심히 올라탔다. 그냥 잠시 올랐다 내릴 생각이었는데, 손으로 물살을 낼 때마다 배가 움직이는 모습이 재미있어 타고 놀다보니 어느새 호수 한가운데 있는 상황을 알게 된 후 겁이 덜컥 났다.

그런데 배안에는 노가 없다. 노가 있어도 저을 줄을 모르지만, 그마저도 없으니 걱정이다. 마침 호숫가에 한 어른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소년은 소리를 질렀다.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 사람은 갑자기 무언가를 던지기 시작한다. 돌이다. 그 사람은 소년이 탄 배를 향해서 연신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부지런히 돌을 던지고 있었다. 소년은 겁이 더 났다. ‘아니, 구해주진 못할망정 돌을 던지다니, 아 난 어쩌지?’ 그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이 탄 배가 어느덧 호숫가에 다다랐다. 그때서야 돌을 던지던 그 사람이 배 가까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배에 묶여있던 줄을 잡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배를 향해 돌을 던진 것은 물살을 일으켜서 배가 호숫가에 닿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소년은 무사히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이제, 그 배에는 제법 많은 식구가 타고 있다. 배 한가운데엔 셋째 아이를 출산한지 사흘 만에 뇌졸중으로 누워있는 저자 김병년 목사의 아내가 누워있다. 그녀의 좌우엔 김목사와 세 자녀가 앉아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누워 있기만 했을 때부터 늘 그랬듯이 엄마의 얼굴부터 자의적으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팔다리를 쓰다듬으며 각기 말을 건넨다. 엄마는 그저 가끔 눈꺼풀로 응답하는 예스, 노와 잔잔한 미소만 지어줄 뿐이다. 이 가족에게 무슨 위로의 말이 필요할까? 시편 23편 말씀처럼 ‘쉴만한 물가’가 과연 이들에게 있기나 한 것일까? 주위 사람들이 저자인 김목사를 위로 한다고 “하나님이 목사님을 크게 쓰시려는 것 같습니다.” 라고 했다. 이 때 저자는 솔직히 화부터 나서 하나님께 따져 묻곤 했다고 한다. “하나님, 정말 저를 쓰시려고 그러신 건가요? 쓰시려면 좀 곱게 쓰실 것이지, 이게 뭡니까!” 어떤 분들은 “특별히 크게 쓰실 것”이라며 ‘크게’를 힘주어 말하곤 했다. 그러면 그는 속으로 더 ‘세게’ 저항했다. “정말 당신이 저를 ‘크게’ 쓰실 뜻에서 이러시는 건가요? 그럼, ‘더 크게’ 쓰시려면 제 자식들까지 다 불구가 되게 하셔야겠네요!” 저자가 목회자이면서도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에 마음이 더 아파진다.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아마 더 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라도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는 세상방식으로 생각하고, 그 스트레스도 세상방식으로 풀려고 할 것이다. 낙심가운데서 하나님께 투정부리는 것도 하나님 은혜다. 내 가슴이 이리도 찡하고 촉촉해지는데 하나님 마음인들 편하실까?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믿는 사람들끼리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모호한 말로 위로하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메시지를 해독해야한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아니면 세상방식으로 한숨만 쉬고, 팔자타령이나 하고 있으면, 다른 가족과 주위사람들까지도 더 힘들어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도 처해진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면, 지속적이지 못한 것이 문제다. 저자 스스로 참 많이도 울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다분히 저자의 부주의함이 원인이기도 했던 아내의 심각한 발의 화상 때문에 수술 후 회복을 기다리던 병원과 집을 오가는 길에 차안에서 흘러나오는 노사연의 ‘사랑’이라는 노래를 듣자마자 비상도로에 차를 세워놓고 강변을 바라보면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부르고 또 부르는 대목도 있다. 이젠 바닥이 났을 법한 눈물이 자꾸만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고 한다. 왜 안 그러겠는가! 남편으로서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다는 것과 특히 화상은 본인의 실수라는 자책감까지 겹쳐져있으니, 더욱 힘들지 않겠는가? 저자는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 때문에 산다.

“우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우리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앞에서 울지만, 하나님은 당신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자녀들의 죄로 인하여 우신다. 애통해하신다. 끊임없이 베푸시는 긍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우셨다.”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고, 피투성이로 누워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에스겔 16:6-8, 새번역)


저자는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음의 고통을 삭힌다. “하나님의 전 존재가 고통 속에 거하셨다.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 속에 있었다.”


저자는 대학 생활 중 IVF를 만나 인격적인 회심을 했고 15년간 IVF간사로 섬겼다. 지금은 개척교회를 섬긴다. 그런 가운데서도 IVF 전국수련회의 주강사로 서야 할 일이 생겼다. 화상을 입은 아내가 사흘 밤낮 중환자실에서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고 있을 때였다. 5천여

명의 대학생이 모인 IVF 전국수련회 첫날 밤, 그는 그 많은 청중 앞에 서서 손을 높이 들고 이렇게 외쳤다. “오늘 이 밤에 우리 모두 오른손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시다. ‘하나님, 저 좀 그만 때리세요!’” 그도 울고 학생들도 울었다. 드넓은 야외집회장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고통당하는 영혼들의 아픔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집회가 끝난 후 개인기도 시간을 갖기 위해 성경을 펼쳤다. 무심코 펼친 성경이 이사야서 43장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또 다른 전국 수련회에서 주 강사 요청을 받고, 많이 망설이다가 힘들게 마음 결정 내린 집회였다. 그의 아픔도 감당하기 힘든데 힘들어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로하라니 하나님도 야속하셔라 하는 마음뿐이었다. 수련회 중에 한 여학생이 엽서를 무려 일곱 장이나 써 가지고 그를 찾아왔다. 그 여학생은 꼭 3년 전에 다른 수련회에서 그의 설교를 들으며 “저렇게 행복하면 나도 웃고 살겠다.”고 비웃었단다. 우울증도 앓았다. 3년이라는 긴 투병생활 끝에 겨우 복학해서 참가한 수련회였다. 처음엔 주강사가 3년 전에 자기를 화나게 한 그 목사인줄 알고 참가하지 않으려했다. 번호가 매겨진 일곱 장의 엽서에는 자매의 삶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목사님, 저는 나팔관 수술을 했습니다. 아기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이번 수련회에서 말씀을 들으며, 내게도 보아스 같은 경건한 남자가 나타나면 결혼을 할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사모님이 일어나시는 그날까지.”

내게 아픔이나 슬픔이 찾아올 때, 그냥 오는 것이 아니란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이유로 온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하나님께 따진 것처럼 ‘크게 쓰시려고?’ 난 잘 모르겠다. 배 한가운데에는 6년째 누워만 있는 저자의 아내가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저자가 섬기는 교회와 가정이라는 배이다. 물론 나도 그의 아내가 기적처럼 일어나도록 기도한다. 실제로 기적처럼, 하나님의 손길처럼 그렇게 일어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고통 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인생을, 사랑을 알아가는 중이다.”


‘난 당신이 좋아’라는 말은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가 아프기 전에 남편인 저자에게 때로는 뜬금없이 했던 말이다. 아마도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도 ‘난 당신이 좋아’라고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여인의 착하고 포근한 마음이 느껴진다. 나도 사랑하는 나의 아내에게 이렇게 고백하련다. ‘난 당신이 좋아’.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나의 가족뿐 아니라, 나의 이웃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아니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내 마음에서 일어나길 소망한다. 그렇다면, 미워할 사람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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