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모든 작품 제목을 좋아하지만 '젊은 남자' 앞에서는 거의 무릎을 꿇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기도 전에 이 짧은 제목 속에 들어 있는 함의를 일종의 스펙트럼처럼 독자에게 펼쳐 보이다니,
게다가 이 굴절을 일으키는 프리즘이 다름 아닌 독자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니!
<젊은 남자>라는 제목 탓에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지만, 이 책에 열정은 없다. 열정 바깥의 모든 것이 있을 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위계와 계급과 성적 불평등, 이 모든 것을 꽁꽁 감싸고 있는 기억과 시간.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아니 에르노는 기억을 환기하는 작가이다. 그것도 대부분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기억을.
그래서 오래전 읽은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떠올릴 때면 나의 기억과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당황하게 될 때가 있다.
물론 나는 프랑스에 살아본 적도 없고 내 삶의 장면들은 그의 삶의 장면과 비슷하지도 않을 것이나, 그럼에도 그의 수치심은 나의 수치심이고 그의 이기심은 나의 이기심이며, 그의 폭력성은 더없이 선명하게 나의 폭력성이다. 응시의 대가인 작가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사랑의 맨얼굴을 본다.
내가 아무리 독한 독자가 되어본들 저쪽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냉혹한 작가가 있다는 것.
이번에도 그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비록 아니 에르노는 나를 모를 것이나) 나는 아니 에르노를 무척 가깝게 느낀다.
기억을 공유한 우리는 어쩌면 자매보다 가까울 것이다.
그는 내 첫 번째 세계의 기억 전달자였다.- P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