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말 많았던 누군가의 저작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번쯤 ‘그런 여자아이’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다.
‘멍청하대, 헤프대, 걸레 같대, 왜 그러고 사냐’ 등등.
2022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는 <여자아이 기억>에서 그 여자아이에 대해,
한때 그 여자아이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다고 썼다.
그렇다면 그 여자아이는 무슨 짓을 했을까.
아직 십 대임에도 여름 캠프 지도교사로 고용된 그 여자아이 ‘아니’는
남자와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게 했던 어머니의 시야를 떠났다는 사실에 도취된 나머지
처음으로 춤을 신청해준 남자와 엉겁결에 밤을 같이 보냈다.
자신이 선택한 남자도, 선택한 사건도 아니지만
그 여자아이는 자신이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굳게 믿어버린다.
그뿐이다.
하지만 이내 일파만파 소문이 퍼지고, 캠프 안에서 아니는 ’그런 여자아이‘가 되어버린다.
함부로 해도 되는 아이.
무엇이든 요구해도 들어줄 아이.
진지하게 사랑할 대상은 아닌 아이.
하지만 그 여자아이는 정확히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소문의 한가운데에 있을 뿐.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한 명밖에 없어, 바로 내 약혼녀야.’
걘 처녀야, 그가 말한다. 자신은 언제나 자기가 처녀성을 뺏은 여자들과만 사랑에 빠졌다고도.
그녀는 자신이 그가 사랑에 빠질 만한 처녀는 아니라는 것을, 아니면 그가 자신의 처녀성을 빼앗는 데 이르지 못한 것에 이래저래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는 굴욕스럽지 않다."
어찌어찌 여름이 끝나고 캠프를 떠난 후에도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그 여자아이는 이미 예전의 여자아이와 같은 아이가 아니다.
극도의 섭식장애를 앓으며 거식과 폭식을 반복하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고 그것을 명명할 수도 없다. 그녀는 그저 먹을 뿐이다."
그날의 상처들이 상당 부분 희석된 후에도 저자는 이 일을 글로 써내지 못했다고 책 속에서 고백한다.
아니 에르노는 50대에 한번, 60대에 한번,
이 책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 끝에 70대가 되어서야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쓰지 않고 죽을 수는 없어서.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2016년에 출간되었으며 이때 작가의 나이는 76세였다.)
"내 앞에 놓인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마지막 애인, 마지막 봄이 있듯 필연적으로 마지막 책도 있겠지만, 그것을 알려줄 징후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아주 오래전 ‘1958년 여자아이’라고 명명한 그 아이에 대해 쓰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이 나를 사로잡고 떠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기억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여자아이가 경험한 것은 설명되지 못한 채로, 아무 이유도 없이 살았던 것으로 남을 것이다."
가족의 치부도, 금지된 사랑도 낱낱이 펼쳐서 써낸 작가에게도
쓰지 못할 것이 있었다니.
하지만 이 책은 그날을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날을 해체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 이 언니, 보통 사람이 아니었지.
몇 번쯤 읽기를 멈췄고
몇 번은 감탄을 하고
몇 번은 욕을 했다.
다시 생각해본다.
…그 여자아이들에게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지금 그 여자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비슷한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그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존재 속에, 그들의 기억 속에,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심지어 행동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이 남자와 보낸 두 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불균형.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
번역이 특히 좋았고, 소녀 대신 여자아이라는 표현을 써주셔서 좋았다.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와 이 책에 대해 간절히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책이다.
부디 나의 친구들이 어서 이 책을 읽어주길.
그런 이들이 있다. 타인들의 현실에, 그들이 말하고 다리를 꼬고 담뱃불을 붙이는 방식에 사로잡혀버리는. -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