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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어딘가 다른 곳에

 -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안개는 우리 동네 집들을

가라앉혔다 아득한 곳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누군가를

불러댔고 누구일까, 누구일까 나무들은 설익은 열매를

자꾸 떨어뜨렸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서리 맞은

친구들은 우수수 떨어지며 결혼했지만 당분간 아이 낳을

생각을 못했다 거리에는 흰 뼈가 드러난 손가락, 아직

깨꽃이 웃고 있을까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불란서문화관

여직원은 우리에겐 불친절했지만 불란서 사람만 보면

꼬리를 쳤고 꼬리를 칠 때마다 내 꼬리도 따라 흔들렸다

왜 이래, 언제 마음 편할래?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와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가 땅 부치는 사람의 양식 절반을 합법적으로 강탈

했고 나는 미안했고 미안한 것만으로 나날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해 가을이 깊어갈 때

젓가락만큼 자란 들국화는

내 코를 끌어 당겨 죽음의 냄새를 뿜어댔지만

나는 그리 취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게 삶이 아니므로,

아니므로 그해 가을이 남겨 놓은 우리는 서로 쳐다봤지

단단한 물건이었을 뿐이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아도

다른 하늘이 덮치고 겹쳤다

이 조개껍질은 어떻게 산 위로 올라왔을까?

 

                                                                                              ;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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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은 6월 3일부터 여름이다.

추위가 가면 술 취한 사내들은 겨우내 담아뒀던 울분을 토하듯 소리를 지른다. 춥지 않아서 빨리 어딘가로 들어가 몸을 녹여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므로 성대가 찢어지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듯, 그 소리는 오래 계속된다.

수도(修道)에 실패한 사내는 동안거(冬安居)의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불립문자의 깨달음을 얻은 사내는 그 깨달음을 언어로 세워 보려는 듯, 여름이 오면 술 취한 사내들은 '할(喝)!'과 같은 소리를 섞어서 어리석은 주민들의 성찰 없는 삶을 꾸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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