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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어딘가 다른 곳에

15년 전, 새 직장을 구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4월 첫날 저녁, 끼니도 거른 채 나는 명동 근처 지금은 없어진 허름한 극장의 앞 자리에 페데리코 펠리니에게서 제목만 빌려온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앉아 있었다. 금요일 이른 저녁이라서 모두 술집 앞을 기웃거릴 무렵이어서였는지 극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마음 속으로만 오래 좋아했던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은 날이어서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도 충분히 우울할 수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는, 오래도록 나와 같은 꿈을 꾼 한 인간의 처음과 끝 내레이션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김지운, 『달콤한 인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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