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자기가 보는 것을 보는 대신 자기가 학습 받는 뇌의 관습에 따라서 대상을 본다.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영국 ‘여성’작가의 열렬한 팬이다. 현대의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의 시리즈가 좋은 소설을 찾아 헤매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이룩한 ‘자본’의 이데올로기로서의 베스트셀러보다는 차라리 빅토리아 시대의 순수문학으로서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브론테의 자매 와 제인 오스틴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고전으로서의 응대. 근대의 여성의 계급적 담론들의 생성. 그러므로 나는 어린아이들처럼 판타스틱한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녀들이 살았던 동시대의 여성들의 고되고 기나긴 삶의 피로함을 느끼면 이러한 현대인들의 불평과 투정은 그저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나는 제인 오스틴을 1995년 제작한 에이미 헥커링의 <클루리스>라는 영화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그러니깐 난 그녀를 책을 통해서 만났기보다는 정확하게는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현대의 분위기에 맞게끔 각색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든 영화에서부터 출발한다. 사춘기 여성으로서의 낭만적인 사랑 혹은 우연적인 만남에서 비롯된 순간적인 사랑. 여기서의 방점은 여성으로서의‘사랑’이다. 언제나 여성에게는 ‘사랑’은 괴로운 일인 동시에 즐거운 일이다. 그 달콤한 속삭임, 부드러운 입술, 몽롱한 눈동자, 달콤 쌉쌀한 그의 입술, 그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 갑자기 세상에서 누구 보다 더 사랑받고 있다는 상상(!), 육체적인 이끌림, 그 아름다움의 형용사들과 수사학들, 그러나 이러한 대명사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적인 개념 속에서 현실적인 존재가 개입하는 순간 이항적인 대립 항이 생성하기 시작한다. 꿈의 박탈. 그러나 제인 오스틴은 끝가지 자기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자기를 보호해줄 것이 라고 믿는 ‘남자’가 있기에 세상은 그래도 살아가기에는 나쁜 세상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그녀의 ‘착한’세상.
1813년에 출판된 <오만과 편견>은 어떻게 보면 탈역사적인 영토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동화 같은 연애극이다. 그 해의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라이프니치전투에서 패하고 그 후 1년 뒤에는 그는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작의 시점이 되는 해이다(1년 전 1812년은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물리친 해이며 차이코프스키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880년 1812년 서곡을 작곡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아수라장속에서의 소동극, 안에서의 도덕과 바깥으로서의 윤리, 가시적인 활동과 비가시적인 역사, 미시적이고 문화적으로서의 사회와 거시적이고 정치적인 법, 예를 들면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준전시적인 상황 속에서 이러한 일이 마치 남에게 벌어지는 상황인 것처럼 무언가 잊어버린 진공의 시간과 여백의 틈을 만들어가며 사랑에 빠진 남녀가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존투쟁을 벌이는 무언극과 같은 것이다. 유령 같은 존재들. 제인 오스틴은 과감하게도 정치적 태도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에게는 사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여성’으로서의 인정보다는 ‘작가’로서의 사회에 대한 수용을 당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목적어로서의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생각으로서의 주체와 행복으로서의 대상이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모더니즘 사회 속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양상의 분위기가 계속해서 그녀의 텍스트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녀의 감각의 수용이 물질로서의 전이된 과정 속에서의 유물론적 변증법의 매개체. 의식의 전도
이안과 조 라이트 사이에서의 제인오스틴은 더없이 훌륭한 조언자로서의 코드이다. 잘 알려진 사실 하나. 이안(<라이어 위즈 데빌>의 영화감독(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작품 중에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와호장룡>이나 <색계>(바로 <만추>의 탕웨이가 나오는)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다니엘 우드렐의 <라이어 위즈 데빌>의 원작으로 만든 서부극이 이안의 무시무시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마치 세계문학전집처럼 반드시 봐야하는 작품처럼)은 할리우드 데뷔작을 제인 오스틴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하였고 그해의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공상과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안과 제인 오스틴의 조합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그 둘 사이는 전혀 공통점이 없기 때문인데, 화어권의 남자와 앵글로 색슨의 여자. 이안은 (라이어 위드 데빌을 만들기전까지) 중산층가정에 대한 세대 간의 불화를 쿵푸, 음식, 결혼이라는 전통적인 양식 안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시트콤으로 그려내고 있다면 제인 오스틴은 대부호의 상인과 몰락한 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급,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자녀들이 벌이는 남녀간의 연예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 그리고 섬세한 느낌의 자연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아무튼 이안은 제인 오스틴을 지정한 것은 결론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이안의 (아메리카에서의) 이방인으로서의 출발은 브리티쉬의 그 고귀함으로부터의 빌려오는 과정이었다면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은 오히려 그들의 ‘영어’권의 문화를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겠다(조 라이트는 이후 이언 매큐언의 <어톤먼트>를 감독한다)
<오만과 편견>은 철저하게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회‘와 ’남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독립적인 여성의 세계관을 구현해가고 싶었던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는 보통사람들이 즐겨하는 사랑의 방식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녀는 둘째이며 위로는 언니가 있으며 그녀는 어머니의 초초함에 의해서 결혼을 서둘러야하는 입장이며 그녀의 두 명의 여동생은 그녀와 다르게 멋진 남자를 만나며 아름다운 로맨스가 펼쳐지는 상상을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입장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아버지는 결혼 지참금에 대해서 항상 신경 쓴다. 난 사실 소설을 처음 읽어보고 결혼 지참금이 나오는 순간 이 말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이 말이 생소했기 보다는(아서 도일의 셜록 홈즈의 추리 소설 속에서 이런 명사는 계속해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아직은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 하지 않았으며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정치적 배재로서의 성.
이 소설은 감정의 흐름을 잘 따라가야 하는 글이다. 그 진흙탕 속에서 첨벙첨벙 튀겨가며 묻히던 치마에서부터 그 여름 일출이 시작되고 있던 조용한 마법 같은 시간의(일명 매직 아워) 저 멀리 햇살을 등지며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오기까지의 디아시(매튜 먹퍼딘)의 만남의 여정 그 사이 벌어지는 커다란 오해와 그로 인해 파생하는 편견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풀어지는 오해들의 실마리 그리고 해결. 그런데 이 로드의 과정이 ’사랑‘의 싹틈의 개별하고도 특수한 과정이었다. 지금의 연애와 그때의 연애 그 사이의 간극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고전 속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과 사람의 지속적으로 벌이는 감정의 진화이다. 행복하게 잘 사는 법은 서투른 오해를 가지지 말고 헛된 편견을 버리는 것. 제인 오스틴의 격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