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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듯이 읽고, 읽듯이 걷고

여행 중에 틈틈이 포스팅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일정 따라 움직이다보면 새벽 4시에 출발하기도 하고 밤 늦게 체크인을 하기도 한다. 밥 챙겨 먹는 것도 큰 일이다. 쌓이는 여독에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드는데, 전기포트에 달걀을 삶다가 그냥 잠들어버리는바람에 삶은 달걀이 구운 달걀이 되기도 했다. 새로 장만한 건데 다시 새것을 사야할 판이다. 일정 중간에 주어진 짧은 휴식 시간에 사진 한두 장과 문장 몇 개를 완성하여 포스팅하곤 했는데 이게 읽는 사람에게는 꽤나 싱거웠던 모양이다. 예전의 여행기에 비하여 글이 짧아졌다며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는 내 친구들. 하기야 메모 수준의 짧은 글에 덜렁 사진 한두 장이 전부였으니.. 게다가 데스크탑이나 노트북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에 있는 앱에 쓰는 글이니 생각이나 표현력이 조그마할 수밖에. 세상이라는 넓은 화폭에 조그만 손가락으로 점을 찍는 행위라고나 할까. 그런 보잘것없는 메모 수준의 글을 왜 쓰려고 했을까.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여행의 순간을 붙잡아두기 위해서? 불만족스러운 단체여행에 대한 화풀이? 현장감의 기록이라 여겼는데 지나고보니 자랑질?

  이래저래 피곤한 여행이 끝난지 열흘이 넘어간다. 여독의 결과는 감기, 감기의 결과는 축농증이 되었다. 달갑잖은 축농증으로 냄새를 못맡고 집중력도 흐려지는 가운데 겨우 정신차리고 몇자 써보고 있다. 평생 앓은 감기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코로나도 피해가는, 여간해서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데 이번엔 된통으로 걸렸다. 아무래도 평소 복용하는 면역억제제가 확실하게 제 역할을 했나보다. 여행도 예상보다 힘들었다. 특히 뉴욕이 그랬다. 30일간의 남미여행 끝에 별책부록 같은 3박 4일의 뉴욕여행. 춥고 음산하고 눈과 비가 오는 겨울의 뉴욕을 감당하기에 내 몸은 늙었는가.


1. 내가 서있는 곳이 맨해튼일까, 브루클린일까?

 

브루클린브리지를 보고 걷기 위해서 맨해튼 5번가쯤에서 지하철F선을 타고 York Street역까지 갔다. 역사를 나오면 눈 앞으로 짠하고 나타주면 좋으련만 브루클린브리지는 그렇게 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러 행인에게 물어보니 하나같이 친절한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 중 더 적극적인 행인은 더 구체적으로 되물었다. 사진 찍는 장소에 가려고 하느냐, 다리를 걷기 위해서 가느냐고 물었다. 걷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데...엥? 사진이 잘 잡히는 곳은 브루클린쪽인데 맨해튼에도 사진 찍는 곳이 그새 개발되었나?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왜 브루클린브리지가 왼쪽에, 맨해튼브리지가 오른쪽에 있지?          

맨해튼 동쪽에서 강 너머의 브루클린을 바라보면 왼쪽에는 맨해튼브리지가 그 옆 오른쪽으로는 브루클린브리지가 나란히 보인다. 반대로 브루클린에서 맨해튼을 바라보면 왼쪽에 브루클린브리지가 그 옆으로는 맨해튼브리지가 나란히 보인다. 엥? 여기는 브루클린인데 이건 뭐지?

 같은 장소를 두어 바퀴 헤맨 끝에 드디어 브루클린브리지에 올라섰다. 궂은 날씨면 어떠랴. 이렇게라도 오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오긴 왔는데...어라, 눈 앞에 펼쳐진 빌딩 숲을 바라보자니 브루클린이 그새 맨해튼으로 변했네. 근데 왜 맨해튼은 우중충하고 낡은 동네가 되어버렸나....

 더 이상 길을 헤매면 날이 어두워질까 두려워서 다리 끝에서 처음 시작점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눈보라는 계속 몰아치지만 언제 또 여기를 오겠는가. 지치고 배고팠지만 그래도 왕복하는 기분도 좋았다.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다리쯤이야 다시 걸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뭐. 다리 끝에서 동네로 접어들며 거리의 환경미화원분들께 지하철역을 물었다. High Street역에서 A선을 타면 된단다. 찾아갔다. 구글맵으로 확인해보았다. 엥? High Street역은 브루클린에 있었다. 이 사실을 남편에게 전하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여긴 분명 맨해튼인데 왜 브루클린이 나오냐며 의심의 눈빛을 보낸다. 이젠 구글맵도 이상하군....그러다가 순간 처음에 내렸던 York Street역이 눈에 들어왔다. 맨해튼 어느 구석이라고 생각했던 York Street역이 브루클린에 떡하니 점을 찍고 있었다. 아, 이 깨달음! 여기는 맨해튼이 아니라 브루클린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이걸 확증편향이라고 하는 건가. 맨해튼에 있다고 믿는 순간 모든 정황을 거기에 맞추고 다른 사실들을 왜곡하고 회피했다. 부끄러움과 참담함. 이게 늙어가는 모습일까.


2. 갑부의 서재

J.P. 모건의 서재에 갔다. 글보다 사진 한 장으로 설명이 끝날것 같다.





마침 전시회도 있었다. 모건의 서재와 미술품 등을 관리했던 사서, 벨 다 코스타 그린(Belle Da Costa Greene)에 대한 전시와 유명 인사들의 자필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카프카, Keats 의 필적을 살필 수 있었고 심지어 영국의 헨리8세의 왕비였던 앤 볼린이 사인한 편지도 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다른 관람객처럼 코트도 맡기고 하나하나 천천히 살려보련만... 짧은 감동과 여운만 안고 발길을 돌렸다.















모건 박물관에 관한 정보는 이 책에서 얻었다. 뉴욕에서 살아본 사람의 글이다.


3.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역쯤 되겠다. 우선 사진 먼저.



승강장 숫자만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큰 기차역이라고 한다. 개업일이 1913년 2월 2일이라고 하니 백 년이 넘은 대단한 건축물이다. 지하세계로 통할 것 같은 승강장 입구만 일별해도 호흡이 멈추는 곳이다. 그러나.... 지친 몸을 잠시 기댈 곳은 아니다. 도대체 의자 하나 찾을 수 없다. 물론 식당이야 있지만 그곳은 철저히 자본주의화된 장소일 뿐이다. 돈이 좀 있는 사람은 식당 의자에 앉아서 편히 밥을 먹고,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은 의자 없는 탁자에 기대 서서 밥을 먹고, 돈이 없는 홈리스는 밖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행인의 동정에 기대거나 쓰레기통을 뒤져서 끼니를 해결한다. 그 모든 것을 한 컷에 담을 수 있는 곳이 뉴욕 맨해튼이다.



세계 여기저기를 다녀보지만 뉴욕은 가장 기가 빨리는 곳인 것 같다. 2019년에도 뉴욕 여행 후 병이 났던 기억이 생생하건만 이번 2025년 3박 4일 여행도 만만치 않은 후유증을 선사하고 있다. 미국 입국 시, 현금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묻질 않나, 호텔 예약증까지 꼼꼼하게 살피지 않나, 미지의 불법체류자를 감별하기 위한 그네들의 불친절하고 도도한 태도에도 기가 질린다. 이런 땅을 돈 싸들고 굳이 찾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뉴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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