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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햇살처럼
  • 인생
  • 위화
  • 12,600원 (10%700)
  • 2007-06-28
  • : 10,692

1.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촌마을을 다니며 민요를 채록하고 노인과 처녀, 아이들을 만나 진솔하고 무지하고 애잔한 이야기를 나누는 나는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의 젊은이다. 실컷 낮잠을 자고 쓸데없는 음담패설로 희희닥거려도 시간이 남아돈다. 그런 나에게 푸구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고 공감하여 이야기가 계속 흐르도록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듣는이를 만나야 생생하게 펼쳐진다. 장단이 싱겁거나 질문의 초점이 빗나가면 이야기는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이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하여 몰두하도록 조용히 머물러 주어야 한다. 누군가가 살아온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그 사람의 속을 풀어주는 것이기도 하고 인생을 소생시켜 준다.

 

 

2.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푸구이, 어쩌면 한심한 인물이다. 도박으로 홀라당 집안을 말아 먹고 어머니와 아내의 인내가 없었다면 어찌 살아있기라도 했을까 싶다. 하지만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거기서부터 묵묵히 농부로서 밭 가는 데 열심을 부리고 처자식의 소중함을 깨달아 아끼며 묵묵히 살았다. 때로는 행운도 따라주어 잃을 뻔한 목숨을 유지했다. 어찌 회한이 없었을까. 무지하게 슬픈 인생사를 가볍게 풀어간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 들이고 오늘도 늙은 소 푸구이와 밭을 간다. 노인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남은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게 위대한 것이라면 추천의 말을 쓴 소설가 '오정희'의 문장에 수긍할 수도 있다. 그런데 푸구이의 삶을 가련하게 들어줄 수는 있어도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체성도 없이 목적한 바도 없이 세상의 흐름대로 흔들리며 살았던 인물이기에 동정은 하지만 긍정은 못한다. 이제 그는  부모와 아내, 자식 둘에, 사위와 손자의 무덤을 앞에 놓고 있다. 그들을 그리워하며 늙은소와 함께 이름을 부른다. 그리움만 가득하다.

 

 

3. 작가의 의도

 

"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1993년 소설이 발표될 당시 작가는 30대 초반이었다. 글의 서문을 보니 작가의 패기가 넘친다.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세상을 동정의 눈으로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꽤 인상적이다. 중국의 복잡했던 현대를 관통하는 푸구이의 삶에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담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따지고 보면 현대사의 사건들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며 비판적 시각을 녹여 담았지만 고발하거나 폭로하지 않고 초연하게 보여준다. 이야기가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고 문체가 개성적이며 유쾌하다. 이야기에 빨려든다는 걸 실감할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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