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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햇살처럼
  • 허먼 멜빌
  • 허먼 멜빌
  • 12,600원 (10%700)
  • 2015-06-10
  • : 1,375

그에게 관심을 주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를 필경사로 채용한 나-글의 서술자이다. 나는 꽤 성공한 변호사이고 조금 특이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들이더라도 그 장단점을 모두 알고 포용할 만한 교양도 인성도 충분하다.


그의 첫인상은 꽤 괜찮았다. '푸르스름한 빛이 돌 만큼 말끔하고, 딱한 느낌이 들 만큼 예의 바르고, 누구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을 만큼 쓸쓸해 뵈는' 그가 바로 바틀비였다. 그는 일도 꽤 잘했고 무엇보다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달라졌다.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그는 사회 조직의 일원이고 일한 대가로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사회에서 스스로를 소멸하겠다는 말과 일치한다. 용감하거나 뻔뻔하다.


여기서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소환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로 시작되는 신화 속 주인공 시지프스인 우리 인간은 삶의 무의미성, 삶의 부조리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자살인가 그래도 희망인가. 과거 바틀비가 한 일은 아마도 생의 무의미성을 깨닫는 과정이었을 듯하다. 


이런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그를 삶의 그물망 안으로 끌어 들이고자 노력한다. 자신과 인연 맺은 사람을 쉽게 내치지 못한 채,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그를 내버려 둔다. 금적적인 도움을 주고자 애를 쓰기도 한다. 인정(人情)을 베풀고 그에 대한 연민을 거두지 않는다. 가족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 사회의 힘을, 공권력과 시스템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법적 판결에 따라 감옥으로 가게 된 바틀비를 위해 은화를 남기기도 한다. 다른 무엇을 더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도 힘 없는 개인은 생의 의미를 잃고 또는 생계 곤란으로 또는 그 어떤 이유로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자연사하기도 한다. 결국 바틀비는 죽음에 다다른다. 그건 그가 선택한 자살 수도 있고, 사회적 타살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던 그를 누가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쓸쓸지만 날카로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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