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가리지 않고 읽던 내가, 자꾸만 거르게 되는 장르가 생겼다. 한국 현대 소설이다. 점점 더 지나치게 사람을 궁지로 몰아가는 스토리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어서다.
영화에서는 더 심하다. 얼마 전 모처럼 넷플릭스에 올라온 한국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인기순위 2위라고 해서 별생각 없이 보는데, 잔인한 장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음향, 극악으로 치닫는 분위기 때문에 겨우 끝까지 봤다.
남들은 재미있다고 잘들 보지만, 나는 지나치게 사람을 자극하는 책이나 영상물은 보기 힘들어한다. 문제는 나는 그 자리에 머물고 있으나, 작품들은 점점 강도가 세지다 보니 더욱 격차가 벌어지는 기분이다.
그러다 오랜만에 고전을 읽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읽지 않아도 읽은 것 같은, 영국 고전의 대표적인 책이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았는데 숨통이 트인다. 자극적인 소설, 영화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다 보니, 고전이 주는 편안함이 이렇게 좋은지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자그마치 400페이지 가까운 두께의 책이 두 권이나 되는데도 지루할 틈 없이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찰스 디킨스의 명성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유려한 텍스트를 읽다 보면 마치 보고 들리는 것처럼 살아 움직였다. 빛소굴 출판사의 매끄러운 번역도 크게 한몫을 했겠지만, 찰스 디킨스의 필력이 대단하긴 했다. 거기에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눈에 그려진다. 도무지 지루한 페이지가 없다.
찰스 디킨스(1812~1870)는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디킨스는 고작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빚으로 수감되는 바람에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열 시간 동안 노동에 시달렸다. 이때 경험이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청소년기부터 고전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떴고, 신문 생활을 할 때 경험은 관찰력과 식견을 더했다. 그 후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데이비드 코퍼필드,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등의 작품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소설 모두가 뛰어나지만, <위대한 유산(1861)>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문학성, 보편성, 통찰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중 나는 '보편성'에 주목한다. 어느 시대에 읽어도 그 시대를 반영해 줄 수 있어서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현대의 창작물보다 훨씬 더 우리의 모습에 가깝다. 이래서 고전은 영원한가 보다.
<위대한 유산>은 1,2권 합해서 3부 5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3부에 걸쳐 주인공 핍의 성장을 다룬다. 그렇다고 단순한 성장 스토리가 아니다. 주변인들 역시도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몇 명은 변화를 거듭한다. 독자는 전체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들의 본성과 욕망을 투영해서 볼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많으나, 세월을 넘나들으며 촘촘하게 서로 관계를 맺게 된다. 마치 퍼즐의 조각조각을 맞추는 기분이다. 그래서 일부 추리소설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책의 대략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핍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나이차가 많이 나는, 누나 '가저리 부인'과 대장장이 매형 '조 가저리'의 손에 자란다. 가난한 계급이었던 핍은 어느 날 마을의 유지, '미스 해비셤'의 집에 출입하게 된다. 미스 해비셤은 부유한 상속녀로 어떤 남자에게 속아서 돈을 바치다가 결혼식 날 남자가 나타나지 않아 그 충격으로 집 안에 칩거한다. 그 후 평생을 남자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녀는 남자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에스텔라를 양녀로 삼는다. 에스텔라는 상당히 아름답지만 교만하고 냉정하게 자란다.
한편 핍은 어느 날 익명의 부자에게 막대한 상속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핍은 미스 해비셤이 자신에게 상속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였고, 아름다운 에스텔라의 사랑을 얻게 될 날을 꿈꾸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미스 해비셤은 핍의 착각을 고쳐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오해하도록 유도했으며, 에스텔라 역시 그의 관심을 밀어내지 않고 허황된 꿈을 꾸도록 여지를 주어서다.
상속을 받은 핍이 착실히 배워 진짜 신사가 되면 좋으련만, 런던에서의 생활은 사랑에 대한 열병, 방탕한 신사 생활을 하며 빚을 진다.
소설 중반을 훨씬 넘어서야, 핍은 누가 자신에게 상속을 해 주었는지 알게 된다. 어릴 때 우연히 도와 준 탈옥수 프로비스였다.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프로비스는 핍이 '신사'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며 스스로 핍의 양아버지임을 자처한다.
비로소 현실을 자각하게 된 핍은 자신을 진짜 아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존경하고 믿을만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다. 미스 해비셤과 에스텔라를 찾아가 상처 입은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면서 이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넨다. 미스 해비셤은 다행히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만, 에스텔라는 여전히 오만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핍의 말을 무시한 채 불행한 결혼의 길로 걸어간다.
프로비스가 죽을 때 핍은 그의 사랑에 대해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되고, 병마와 싸울 때 매형 조의 헌신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후, 청춘을 함께 한 친구 허버트와 건실한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운다.
전체 스토리는 절대 단순하지 않다. 등장인물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서로 촘촘하게 엮여있다. 아침 드라마에서 한정된 배우로 스토리를 꼬아내듯, 인물 간 지나치게 관련성이 높은 면도 일부 존재하지만, 그래서 각자의 서사가 빛을 발하는 것도 사실이다.
고전답게 사랑과 증오, 믿음과 배신, 음모와 복수, 득죄와 응징, 은혜와 배은, 화해와 용서가 모두 담겨 있는 소설이다.
핍이 받은 '위대한 유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돈?
결코 아니다. 오히려 돈은 그를 방탕한 삶으로 이끌었다.
돈을 모두 잃었을 때, 비로소 그는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잘못을 반성하고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탈옥수 프로비스.
너그러운 품성과 자애로움을 지닌 매형 조,
늘 한없는 지지를 보내는 친구 하버트
이들을 통해 핍은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정신적 자각이야말로 '위대한 유산'이다.
핍이 신사가 되기를 바랐던 프로비스, 핍이 신사가 되었다며 좋아했던 조.
이들이야말로 진짜 신사였던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은 인간의 보편성이 무엇인지, 작품의 보편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래서 언제 읽어도 지금 우리의 이야기 같은, 고전 같지 않은 고전이다.
무더운 여름,
핸드폰은 잠시 내려놓고,
투명하고 순수한 영혼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청량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분수대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음을 자신해 본다.
ps. 고전 문학은 번역에 진심인 경우가 많다. 빛소굴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이세순 교수님의 정성어린 번역 덕분에 마치 영화를 보듯 책을 읽었다. 고전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