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에 바치는 부끄러운 고백
글_ 김주경 (2017년 5월 30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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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반환점을 돌았을 때, 내 맘과 가까운 사람이 내게 물었다. 80년 5월의 광주를 아느냐고. 그는 태생적으로 광주의 아픔을 체감한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 예상했다는 듯 그가 대답했다. 실망도 체념도 아닌 담담한 목소리였고, 익숙하다는 반응이었다.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던 적이 또 있을까? 나는 간신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더 모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노라고 덧붙였다. 지금부터의 고백은 그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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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하더라도 변명으로 글을 연다. 나는 서울올림픽의 해에 (당시엔 국민학교라 부르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80년대의 끝자락이었지만, 여전히 반공교육이 남아 있었다. 반공 글짓기, 반공 표어 짓기, 반공 그림 그리기와 같은 대회가 줄곧 열렸다. 반공 그림 대회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친구의 뛰어난 그림을 보고 좌절했던 어린 마음이, 그 기억을 마음에 새긴 탓이다. 친구는 한국전쟁에서 수류탄을 던지는 국군의 뒷모습을 그렸다. 그것이 여덟 살 난 아이들에게 주어진 소재였다.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죽은 이승복 어린이는 우리의 어린 영웅이었다. (나는 이승복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한마디로 나는, 전통적으로 보수당의 텃밭인 곳에서, 보수적인 정치 성향의 부모님 밑에서, 반공 교육의 마지막 세대로 살았다. 그 후로 제도권 교육을 받으며, 역사에 무지한 상태를 유지했다. 역사와 정치에 무관심했고, 어린 시절에 받은 반공교육만 가슴에 남아 ‘좌(左)’에 대한 심리적 반감을 일으켰다. 김대중, 노무현에 대해, 전라도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과 실체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내 나이 스물여덟,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당연히(라고 써서 미안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민주화운동’이란 표현보다 ‘사태’ 혹은 ‘폭동’이란 표현에 익숙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사 한 줄 모르면서 찝찝하게 여겼고, 5·18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잘못은 했겠지’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동시에, ‘괜히 국가가 폭력을 가했겠어?’라고도 생각했다. ‘세상에 털어서 죄 없는 사람 없듯이, 역사에서 전적으로 잘못한 쪽이 어디 있겠어?라는 양비론적 사고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이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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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책 얘기를 시작한다. 책은 공권력이 시민을 압살한 사건의 기록이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생생하다고들 하는데, 이 책을 두고 한 말 같았다. 무장한 군인들은 학생, 어른,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무차별로 폭행했다. 골목을 쫓아가 때리고, 버스에 들어가 때리고, 운전석에서 끌어내 때리고, 옷을 벗기고 때렸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자국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살상했다. 그중에 압권은 다음 대목이었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그 순간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다. 1시 이전의 발포가 급작스런 상황에서 이뤄졌다면 1시부터는 명령에 따라 ‘집단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 (중략) 그때 곽형렬(21세, 전투경찰)은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모두들 부동자세를 취하니까 흥분되어 있는 시민들을 잠시 멈추게 하려고 애국가를 울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국가가 채 끝나기 전에 한꺼번에 여러발의 총성이 울렸다. 탄피가 아스팔트 위에 툭툭 떨어지고 분수대 주변에 연기가 자욱했다. (중략) 장교인 듯한 사람이 소리쳤다. / “이 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 공수대원들은 그때부터 조준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때까지 시민들에게는 총이 없었다.”(200-201쪽)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시민은 무의식적으로 예의를 표하고, 공권력은 ‘조준사격’을 자행한다. 국가주의의 비극을 이보다 생생히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신(神)이 된 국가는 애국가로 재림했고, 신의 대리자인 군부는 저항 세력을 신성 모독으로 몰았으며, 공권력은 사제의 신분으로 이단자를 처단했다. 국가가 종교의 권위를 취할 때 세상이 경험하는 기괴함을 단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초 세계사(世界史)는, 국가주의의 출현과 기승, 파괴력과 몰락을 보여줬다. 그 어떤 형태의 국가주의를 향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수백만의 피를 흘려 인류가 얻은 교훈이다. 우리는 뭐가 부족해 그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다시금 피를 흘려야 했을까.......
2017년 5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단 한 건의 유혈사태 없이 최고 통치자를 끌어내렸다. 나 역시 지난가을 내내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 수줍게나마 ‘증언’하자면,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은 질서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우리는 시위를 즐기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짧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국가의 폭력은 언제나 정당한가?’라는 질문은 더는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이 땅의 민주주의가 80년대에 빚지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혹자가 역사를 왜곡하려 해도, 질문과 증언과 행동을 시작한 대중을 막을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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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의 말’에서 저자 대표는 이렇게 썼다. “5·18 왜곡세력들은 (중략) 이 책의 집필과정에 대한 왜곡과 집필자들에 대한 비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4쪽) 저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책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이런 시도는 가시지 않은 것으로 안다. 여기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설명을 위해 우회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마가복음>은 기독교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마가는 다소 유약한 젊은이였다. 그는 바울의 선교여행에 수행원으로 동행했다가 중도에 하차했다. 그 다음 선교여행 때 바나바가 마가를 데려가려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고(행 15:38, 새번역), 이 일로 두 위대한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심하게 다툰 후 갈라섰다. 게다가 마가는,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마가란 위인은 미덥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마가의 전력(前歷)을 이유로 마가복음을 비판한다고 해보자. ‘선교지에서 도망간 사람이 쓴 복음서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어?’ ‘예수를 배반한 제자의 제자라며?’라는 식으로 비판할 것이다. 이 비판은 설득력이 있을까? 마가복음이 마가 개인의 저작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어디 가서 ‘복음서는 마가 개인의 저작이다’라고 말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삼가시라. 복음서가 경전(經典)이기 때문이 아니다. 복음서는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여러 증인의 증언이며, 교회 공동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신약학자 보컴(R. Bauckham)은 복음서를 ‘증언’으로 보며, “증언으로 이해하는 복음서는 예수라는 역사 속 실체에 다가가는 방법으로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한다(리처드 보컴, 『예수와 그 목격자들』(새물결플러스, 2015), 27쪽).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현대의 역사비평 철학과 방법의 발전 양상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경향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곧 증언을 신뢰하는 것을, 역사가가 독립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리에 혼자 힘으로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경향이다. 하지만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증언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위의 책, 같은 쪽)
복음서가 증언의 산물이라면, 복음서의 정당성을 마가 개인에게만 귀속할 수 없다. 그 속에는 마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녹아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 예수는 증인들의 증언에 기초한다. 예수를 경험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예수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기억했다. 그 기억이 모여 복음서의 뼈대가 되었다. 이로써 자기 손으로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던 예수의 말과 행적이 책으로 남을 수 있었다. 예수는 죽기 전 마지막 의식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를 기억하여라.”(고전 11:24, 새번역) 초대 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
『넘어넘어』의 85년 초판은 약 300쪽인데 비해, 이번 개정판은 600쪽에 달한다. 거의 두 배로 늘었다. 725번까지 이어지는 미주만 70쪽 분량이다. 30년의 세월을 반영하느라 분량이 늘었고, 늘어난 분량은 더 많은 목소리를 끌어안았다. “(전략) 기록의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몇몇 사람이지만 취재에 응하고 자신이 겪은 바를 구술한 시민들이 또한 함께 참여했으니 이 기록이야말로 동시대 민중의 증언이라고 할 만했다.”(10쪽) 누구의 말마따나, 양의 증가는 질의 향상을 수반한다. 기록으로 남은 증언은 시대의 어둠을 알렸다. 복음서가 증언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넘어넘어』 또한 증언의 산물이다. 복음서가 예수의 메시지를 매개했던 것처럼, 『넘어넘어』는 민주주의의 도래를 매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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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으로 역사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 무지이며 오만이다. 다만 피와 눈물로 80년대를 지켜내고 기억한 사람들을 지금 여기서 기억하겠노라 다짐할 뿐이다.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면, 기꺼이 투쟁하겠다. ‘기억하라’를 최소한의 당위로 삼겠다. 역사의 진보에 이름없이 기여하겠다. 이것은 시대의 증언에 바치는 부끄러운 고백이나, 부끄럽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겠다. 부끄러워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