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의(義)가 입맞출 때>
글_ 김주경 (2017년 4월 15일)
성서에는 ‘의(義)’라는 말이 의외로 많이 등장한다. 의, 공의, 정의, 의인 등으로 분화되긴 하지만 말이다. 단순 비교해 봐도 체데크 어군은 헤세드보다 등장 빈도수가 높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가 신학계의 화두로 부상하며, 하나님 보좌의 두 기둥인 미슈파트와 체데크에 관심이 모아졌다(시 89:14; 97:2). 그럼에도 미슈파트와 체데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은(한국어 기준으로) 찾기 어려웠다. 몇몇 구약학자의 저작이나 혹은 아브라함 J. 헤셸의 『예언자들』을 통해 짧게 맛볼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의’ 개념을 연구한다는 이 책의 제목만으로 무척 반가웠다.
이 책은 (제목대로) 잠언의 ‘의’ 개념을 연구한다. 저자는 ‘의’가 정의(justice)와 (의미를 공유하면서도) 다르다고 보면서, ‘의’ 개념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그 가설에 따르면 ‘의’는 “구체적인 행동을 넘어 인간 혹은 신적 개체 전체가 갖는 통합적 특성으로서 도덕적 선택에서는 반듯함으로, 사회적 거래에서는 공정함과 자비심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51,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 간단히 말해 ‘의’는 개별 행동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어떤 품성으로써 표출된다. ‘의’에 대한 저자의 가설은, 사실상 책의 핵심 주장이자 결론이다.
2장에서 저자는 ‘의’ 개념에 대한 선행 연구사를 탐색한다. 학계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의로움을 규범의 문제로 보는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공동체 내부의 관계성으로 보는 입장이다. 쉽게 말해, 의로움을 판별하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느냐, 아니면 공동체의 특수성이 반영됐느냐 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규범 중심 이론)은 체데크(의로움)란 말의 뜻이 무엇인가에 집중했다. 반면 후자는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요구를 서로 충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이 “애매하고 주관적으로 변질될 위험이 다분하다”고 평가한다(64). “의로움의 개념이 풍성하고 탄력적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객관적 정의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66).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우주의 구성 요소 간에 경계선을 긋는 것으로 표현되었듯이 공의로움이라는 개념의 본질도 분별하는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67) 이외에도 의로움을 ‘영혼의 순전함’, ‘구원과 능력’, ‘세계 질서’, ‘인과율’, ‘사회 개혁’ 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저자의 눈에는 어느 것도 마뜩치 않다. 이 장의 마지막 두 문장에 저자의 요지가 압축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잠언은 의로움을 사회적 규범보다는 개인의 가치 체계로 취급한다. 의로움은 가장 근본적인 미덕이며 품성 개발의 열쇠가 된다.”(86)
자연스레 3장에서는 잠언이 묘사하는 의인의 면면을 살펴본다. 잠언은 인간을 의인과 악인이라는 이진법적 구도로 이해한다. 중간 지대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행동보다 품성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그렇다.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척도는 개별 행동이라기보다 전인적인 면모이다. 구약의 의인(차디크)는 법률적, 사회적, 제의적 맥락에 따라 의미망이 달라지는데, 그 어느 것도 잠언의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잠언이 말하는 의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유용성보다는 정당성을 기준으로 도덕적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다(111). 그에게는 “의로워지려는 욕구”가 있다. 그는 유력하고, 공감하며, 현명하고, 의를 추구하며 기쁨을 느낀다.
이 ‘욕구’라는 단어가 연결고리가 되어 다음 장을 이끈다. 잠언이 피교육자를 의인으로 만드는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다. 잠언은 피교육자가 모범적 인물을 욕망하여 모방하도록 한다. “잠언의 생도는 의인이라는 인간상을 연구하고 모방해 내면화해야 한다.”(163) 잠언은 인간이 욕구하는 존재임을 긍정하며, 그 욕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이끈다. 단순히 의로운 덕목을 실천하는 것과 의를 욕망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은 단순히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를 욕망하는 사람이며, 의를 욕망하는 태도는 그것 자체로 그의 품성이 된다.
5~7장은 약간의 사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5장에서는 부(富)에 대한 잠언의 평가를 살피는데, 그 결론이 매우 유익하다. 조금 길지만 인용하면, “잠언은 가난이 부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부를 갖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 가치관은 더 고등한 가치 기준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데, 의로움을 향한 욕구가 가난 대신 부를 택하려는 마음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기준이다.”(192) 6장은 잠언과 이집트 지혜문헌(「아메네모페」)을 비교하여, 잠언의 의로움이 인성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이 더욱 도드라진다고 주장한다(232). 7장은 시편과 비교하는데, 두 책 모두 의를 품성으로 이해하지만, “의로움이 사람을 구원과 행복으로 ‘이끈다’는 것이 시편의 가르침이라면, 잠언은 의로움이 곧 행복‘이라고’ 가르친다는 데 차이가 있다.”(267)
여기까지가 책의 내용인데, 결론은 의외로 싱겁다. 1장의 가설이 옳았다고 결론짓기 때문이다. 결론이 싱겁다고 해서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밝혔듯) 사회정의와 구별되는 ‘의’ 개념을, 조직신학이 아닌 성서신학의 관점에서, 그것도 예언서가 아니라 지혜서를 중심으로 훌륭히 검토했다. ‘의’ 개념과 관련된 저작도, 지혜서 관련 저작도 부족한 한국 신학 생태계에서, 이 책은 발군의 가치를 확보했다. ‘의’를 키워드로 잠언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만으로 이 책을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이 책은 학위논문이면서도 문체가 깔끔하고 설명이 어렵지 않아서, 찬찬히 읽는다면 비전공자가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비평이라기보다,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는 정도로 몇 자 써두겠다. 먼저, 체데크를 연구하며 왜 미슈파트와 연관성을 살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미슈파트와 체데크는 빈번히 쌍으로 등장하며, 그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 체데크가 관계 속에서 수행되는 의로움이라면, 미슈파트는 체제(시스템) 속에서 수행되는 의로움이다. 미슈파트가 체데크의 부족분을 충족할 때, 의로움을 규범과 관계 속에서 살폈던 2장의 논의를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규범적 의로움은 미슈파트에게 넘겨주고, 관계 속의 의로움은 체데크에게 할당하면, 두 개념이 충돌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또한 미슈파트를 거론하면 체제(시스템)로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 저자는 의인은 다른 의인을 욕망하며 모방하는 것으로 형성된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것뿐일까? 의로운 삶은 비단 잠언만의 주제가 아니라 성서 전체의 관심사다. 오경에서부터 미슈파트와 체데크는 이스라엘 민족의 생래적 의무였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체다카)와 공도(미슈파트)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받은 법(토라)의 핵심은 체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었다(편의상 체데크와 체다카를 혼용한다). 토라는 법이며, 법은 체제(시스템)이다. 잠언은 솔로몬이 아들에게 전하는 교훈의 형식인데,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교훈 또한 ‘토라’이다. 그렇다면 ‘토라’가 사람을 교훈하여 빚어내는 데에는 체제(시스템)의 역할도 한 몫 하기 마련이다. (체제라는 말이 불편하면 공동체로 바꿔도 될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런 사소한(?) 아쉬움들을 뒤로 하면,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강력하다. 책의 논지처럼, 의로움 혹은 의인이 ‘품성’이라면,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선포하는 구원 공식(예수 믿고 천국 가자)을 뒤흔든다. 피안의 세계에 천착하는 한국 교회는 인간의 품성을 운운하는 잠언의 가르침을 소화할 깜냥이 될까? 저자는 의로운 삶이 지혜로운 삶과 상통한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가르쳐주었다. 독자의 다음 과제는, 의로운 삶이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저자가 책의 72-75쪽에서 거론한 ‘의’와 구원의 상관성 문제가 아니라, 의로움이 ‘예수 믿고 천국 가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의 문제이다.) 고민이 깊어진다면, 잠언 그리고 ‘의’ 개념은 한국 교회의 천박한 구원론을 수정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지혜로운 삶과 의로운 삶의 접점을 강구하는 모든 신자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