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여행,
그리고 그림책 한 권 “초록비 내리는 여행”
1.
“
차나무는 특이하게도 가을에 꽃을 피우면 겨우내
간다.
그리고 일 년 뒤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고 새로이
꽃을 피워 열매와 꽃을 같이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일대에서는 차나무를
실화상봉수(實化相逢樹:
열매와 꽃이 서로 만나는 나무)라 부르며 귀하게 여겨,
어머니들은 딸이 시집갈 때 차씨를 싼 주머니를 챙겨
주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시집간 딸을 다시 만나기 어려웠던
만큼,
꽃과 열매가 한 해를 돌아 만나는 차나무처럼 딸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어머니의 염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19쪽)
차나무는 꽃과 열매가 만나는 데에 1년이 걸린다. 차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음료다. 그 풍미를 아는 사람만이 차를 즐긴다.
2.
섬진강
여행때 오치근 화가로부터 마음이 담긴 그림 한 장을 받았다. 그림에 낙관이 없었다.
" 언제든지 이곳에 다시 와 주세요. 그때 낙관을 드릴게요. 세월이 걸려도 좋습니다. 이 인연이 여기서 끝이 아니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의미에서 낙관을 하지 않았어요."
에둘러 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아는 그가 바로 <<초록비 내리는 여행>>의 저자다. 이 책은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오치근 화가가 가족과 함께 우리 차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 남도의 차유적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쓴 그림이야기로, 어른 아이 누구나 “차”의 세계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이다. 차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대부분 중국차나 일본의 다도에 관한 것이고, 우리 차에 대해선 보성과 하동 차밭 정도나 기억하고 있는 게 우리들의 실정이라 우리 차에 대한 이런 자세한 안내서가 나온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책은 세겹의 얼개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저자가 아이들 눈높이로 쉽고도 생생하게 쓴 우리차 기행, 둘은 작가와 은별, 은솔이가 그린 차 유적지 곳곳을 담은 그림, 셋은 우리차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차 문화 전반을 알 수 있도록 덧붙이기 형태로 수록한 차 만들기, 차의 역사 등 차에 관한 전문적이고도 유용한 정보들이 그것이다. 이 셋이 어울어져 차의 세계를 향한 하나의 알차고 풍성한 여행의 길잡이가 되었다. 저자의 발걸음은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있는 경남 하동과 차씨를 가져왔다는 수로왕비 허황옥의 김해 유적 등 차의 발원지에서 시작되어, 구례 화엄사, 칠불사, 선암사 부안의 원효방과 울금바위, 녹우당, 다산초당, 대흥사 일지암, 진도의 운림산방, 광주의 춘설헌, 사천의 다솔사, 보성의 녹차밭은 물론이고, 경주 석굴암의 문수보살이 손에 든 찻잔에까지 이른다. 그 발걸음에 따라 차에 얽힌 고사가 실타래처럼 풀어나오고, 우리 차 문화를 이룩했던 다인들,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의 아름다운 교유와, 다산 정약용,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의 차에 대한 사랑이 저자가 그린 운치있는 그림과 함께 펼쳐 진다. 차문화가 사찰문화와 밀접해 푸른 차밭과 산방의 대숲, 오래된 산사에 얽힌 옛이야기까지 들으며 책의 안내에 따라 여행하면,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와 더불어 차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
* 저자가 답사한 우리 차문화의 현장
차의 세계에 입문하게 하는 것은 평생 지니는 좋은 취향 하나를 선물해 주는 것이다. 모든 기호품이 그렇듯 차는 여유의 산물이다. 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은 “차”라는 음료 만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차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마신다. 자연의 차나무에서부터 제다과정, 시음방법, 다기, 차관(다실), 심지어는 함께 차마시는 사람들과의 담소와 교유까지 마신다. 그래서 역사가 오랜 물건인 “차”를 마시면 아주 두껍고 풍성한 이야기 속에 내가 편입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차를 마시는 순간 나는 자연인 "나"가 아니라, 차로 매개된 보다 시원적인 어떤 것에 맞닿은 문화적 지층 속의 "나"가 되는 것이다. 내겐 차의 아우라가 덧 씌워진다. " 그이는 차마시는 사람이야". 차는 책, 언어나 음악처럼 하나의 세계를 향한 관문이다.
그런데 이 책이 여타 차에 관한 이야기와 다른 점은 우리 차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길잡이서가 될 수 있다는 점외에도 책 자체가 지닌 매력 때문이다. 차,
여행, 그림, 에두름의 상징인 셋이 한 곳에서 만난 책답게 책은 그윽하고 향기로운 글과 서정적인 채색 수묵화로 가득찼다. 책을 펼치면
제목처럼 푸른 찻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차 한 잔을 마신듯 청신해진다. 책을 만든 이들의 이름- 나리, 은별, 은솔, 은반-만 봐도 하나의 맑은 세계가 그려진다. 그림만 보아도 좋을 책이다.
*구름이 숲을 이룬 곳/ 진도의 운림산방
주마간산의 관광이 아니라 여행, 사진이 아니라 그림, 커피가 아니라 차가 있는 그런 삶, 그런 나들이가 그리울 때, 아니 훗날을 위해 그런 세계의 아름다움을 자녀들에게 맛보게 하고 싶다면, 이 책의 목차를 이정표 삼아 시간 날 때마다 한 곳씩 남도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 초록비 내리는 이 푸른 오월이 그 시작이면 더 좋겠다.
* 덧붙이기: 목차
초록비 내리는 여행을 시작하며 4
· 은별이, 은솔이네 가족 소개 10
오래된 차나무를 찾아서 경남 하동의 천년 차나무 14
바다 건너 남쪽 나라 공주가 가져온 차씨 경남 김해의 장군차 21
덧읽기 차의 역사와 유래 28
어머님께 바치는 차 전남 구례의 화엄사 사사자 삼층 석탑 35
구름 위 정원에 퍼지는 황금빛 차 향기 경남 하동의 칠불사와 발효차 44
네 번 흘러 마음을 씻어 주는 찻물 전남 순천의 선암사와 야생 차밭 52
덧읽기 차나무와 차의 종류 60
깨달음과 상생의 차 전북 부안의 원효방과 울금바위 67
문수보살의 찻잔을 찾아 경북 경주의 석굴암 76
덧읽기 다구와 찻물, 찻자리 준비하기 83
초록빛 비가 내리는 집 전남 해남의 녹우당과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90
차 향기로 맺은 인연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99
덧읽기 강진 청자, 고려청자의 영광 110
차와 학문, 예술의 교류 공간 전남 해남의 대흥사 일지암 113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차 향기 제주의 추사 유배지와 오설록 티뮤지엄 121
덧읽기 차는 어떻게 만들까? 128
소나무 아래서 마시는 신선의 차 전남 진도의 운림산방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