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6 박현욱.
책처돌이들의 연애 소설.
박현욱 소설은 엄마가 2008년에 ‘그 여자의 침대’를 제값 주고 사 놨다. 나한테 사다 달라고 한 주문목록이 아직도 있다. 그땐 알라딘 달력 사은품 마일리지 차감 없이 그냥 줬는데 이젠 얄짤 없어요…
‘아내가 결혼했다’는 내가 5년 전에 중고셀러에게 천원에 사 두고 아직도 안 봤는데 지금 찾아보니 백원에 파는 곳이 수두룩 빽빽하다. 아오 빡쳐. 원작은 안 봤어도 영화는 최소 두 번? 세 번? 봤다.
개봉 당시 엄마랑 심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중, 앞자리에서 갑자기 욕을 하며 일어나는 누군가가 있었다.
“아오씨, 이것도 영화라고!”
남자는 동의를 구하듯 빠르게 극장 안을 슥 둘러보다 재빨리 비상구로 뛰쳐나가고, 동행인 듯한 여자가 뒤따라 나갔다. 그 장면이 너무 우스웠다. 아나이스 닌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인아 씨의 실존 모델이 있었구나… 싶었고 주인아 씨의 작은 댁(?) 역을 했던 주상욱 배우가 자기 딸 이름을 주인아로 한 것도 재미있었다. 그 캐릭터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네… 원작 소설은 과연 보게 될지 아닐지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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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가가 ‘아내가 결혼했다’이후 1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을 냈다고 홍보하는 걸 봤다. 무슨 작품, 어떤 작가, 이거보다도 아니 18년 동안 안 쓰고 뭐했어...어디갔다 왔어...그게 먼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하지 않아‘라는 제목이 재미있었고, 띠지의 30대의 리얼 (환승) 연애담이란 광고에서는 코웃음이 나면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이제 50 넘어 환갑 바라보는 작가가 청년기 끄트머리의 순간들, 마음들을 어떻게 그려낼지… 요즘의 젊은이들도 공감할 수 있을지… 나중에 보면 등장인물이 대입 준비하던 무렵이 IMF어쩌고 흘리듯 나와서 아… 20 몇 년 전의 30대였네 이 친구들은...하고 대충 감이 오긴 한다. 이걸 최근에 쓴 건지, 예전에 써 놓고 이제 발표한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부터 이런 문장과 전개라니… 아마도 지금 나는 유물을 읽고 있어… 그런데 이게 오히려 좋은 거다. 레트로 감성 뿜뿜 정도가 아니라 그냥 과거 그 자체야...역사책인가… 세 인물은 30대 중반으로(콕 집어 35, 36살 정도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뭔가 우려한 대로 4-50대 어르신이 30대 가면 쓰고 연기하는 기분이 물씬 들었다. 내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에이, 그래도 어느 세계에서는 30대 아이들(?)도 나보코프 소설로 공감하고, 극장에 ‘카사블랑카’ 보러가고, 그러다 동물원도 가고, 반하고 그러겠지….
+봄이었고, 사월이었고, 스무날이었다. (9, 이 책의 첫문장이다...)
달이 바뀌었다. 오월의 첫날이었다. (18, 두번째 장의 첫문장이다… 장마다 거의 팔할을 시간 또는 계절적 배경을 소개하는 간단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작가님은 아마도 ‘여름이었다‘ 밈을 모르시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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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여름이었다
+태주가 말했다.
“여자와 동물원에 간 건 처음이네요.”
“저도 남자와 동물원에 간 게 처음이에요.”
“여자와 <카사블랑카>를 본 것도 처음이네요.”
“저도 남자와 <카사블랑카>를 본 게 처음이네요.”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태주는 알지 못했다. 명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던 것도 같았다. 또 전혀 알지 못했던 것도 같았다. (64, 저도 이런 식의 대화를 읽는 건 처음이네요…고문 아니냐 닭살 돋는 걸 코앞에 가져다 놓고 보게 하다니...)
+태주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불쌍한 험프리 보가트. 험버트, 험버트.”
“롤리타!” 명이 탄성을 발했다.
“저, 나보코프 정말 좋아하는데.”
태주가 말했다.
“저도요.”
명은 소리 없이 활짝 웃었다. 어떤 남자가 험프리 보가트에서 험버트를 연상할까. (나도 자주 둘을 헷갈렸는데...명아 너 나한테도 반해야 되는 거 아니냐…) 태주는 벅차기까지 했다. 어떤 여자가 험버트라고 하면 ‘롤리타’를 떠올릴까.(야 알라딘서재 가면 그런 여자 겁나 많단다) (59, 여기서 알 수 있었다. 이건 책처돌이 새끼들의 사랑이로구나...나도 저 상황이면 어머어머 맞아맞아 하면서 반할 것 같긴 하다...)
태주가 초점 화자에 가깝다. 왜 가깝다고 하냐면, 태주 심리와 인식이 사건 전개의 중심이긴 한데, 바로 위의 인용 부분처럼 가끔 한 문단 안에서 전지적 작가시점이니까 데헷 하면서 태주와 명과 재하의 속생각과 느낌이 그대로 불쑥불쑥 솟아나오는 문장들이 있어서 그랬다. 이렇게 쓰면 말이죠 초점 흐려지고 정신 없다고 문창과 초년배 학생한테도 교수님이 이 따위 소설로 난 합평 수업을 진행할 수 없어욧, 이러고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고요… (같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꼬꼬마였던 내 친구가 한* 선생님께 그렇게 쳐맞고 짓밟힌 새싹이 될 뻔했지만 다행히 뒤지진 않았구요…)
뭔가 세세한 이야기만 길었는데, 사실 이 소설은 제목이 곧 내용...이기 때문에 요약을 쓰기도 그렇다. 90년대 중반을 풍미했던 ‘잘못된 만남’ 그 노래가 이 소설 서사의 거의 전부이다. 실수로 튄 담뱃재 불똥(시벌거 나쁜 길빵놈아) 때문에 우연히 마주친 태주와 재하(얘가 길빵함). 태주는 우연히 마주친 재하랑 별로 안 친하다고 생각해서 같이 놀자는 재하의 제안에도 시큰둥하다. 뒷부분에 대학 시절 태주가 좋아한 경이랑 재하가 자 버리고 연이란 애랑도 자 가지고 그 사실을 안 경이 빡쳐서 휴학해버리는 회상이 나오는데, 태주는 재하 새끼 때문에 다시 경을 볼 기회마저 사라져 친하긴 커녕 약간 웬수진 느낌이다. 그런데도 그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건 태주의 여자친구인 명의 매력과 그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의 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웃고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 중에 세 사람이 있고, 그 세사람 중 하나가 자신임을 의식하고는 태주는 흐뭇해졌다. 술김에 마음속에 있던 말을 해버렸다. 흰 발목 아래 지저분한 하늘색 캔버스 운동화를 신은 단정한 콧날의 여자에게. (중략) 테이블 위에 하나 둘 셋 늘어나는 초록색 하이네켄 병이 그렇게 예쁜 색깔일 거라고, 아니, 하얀 발목 위에 있는 치마의 청록이 조명 아래서 밝게 빛나는 하이네켄의 초록보다 더 예쁠 거라고 대체 누가 알았겠어요. (17, 마지막 문장 누구 속말이야 ㅋㅋㅋㅋ태주인가 작가적 논평인가….그런데 여기서 이 오글거림의 극단에서 오히려 난 이 책에 흥미를 느끼고 부지런히 읽기 시작한다…)
이후로 재하는 명을 만나는 자리에 자주 태주를 부른다. 명이 태주를 부르자고 했다면서. 여기서 살짝 의문이긴 했다. 자기 여자친구가 자꾸 우리 만나는 자리에 다른 남자 부르쟤… 더 웃긴 건 이렇게 셋이 모여 놓고 재하는 업무 바쁘다고 자꾸 자리를 비켜준다. 둘만 남겨 놓고 여지를 준다. 처음에는 재하가 칠조어론의 촛불중처럼 절시나 NTR같은 거 있는 변태새끼인가 싶었는데 읽다보니 그것도 아닌 것이 설마 뻔하디 뻔하게… 으음? 이것이 바로?
난너를믿었던만큼난내친구도믿었기에 난아무런부담없이널내친구에게소개시켜줬고 그런만남이있은후부터우린자주함께만나며즐거운시간을보내며함께어울렸던것뿐인데
그런 만남이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넌 나보다 내 친구에게 관심을 더 보이며 날 조금씩 멀리하던
그 어느 날, (김건모, ‘잘못된 만남’ 중)
ㅋㅋㅋㅋㅋㅋㅋ갑자기 김건모로 빙의해 버린 건 정말 그런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서로 호감을 느낀 명과 태주는 각자 재하에게 헤어짐을 말하거나 명에 대한 호감을 고백한다. 그렇게 환승에 성공한 둘은 꽁냥꽁냥 연애 잘하고 그런 장면이 한동안 펼쳐진다. 나 한국문학에서 닭살 돋는 연애 장면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대부분 이혼하고, 헤어지고, 양육비로 싸우고, 돈 빌리고 안 갚고 헤어져서 돈 받기 힘들어지고, 뭐 그런 거만 보다가 보니까 이게 또 새로웠다. 드라마엔 꽁냥꽁냥 많을 것 같은데 제가 드라마를 잘 안 봐서요…
태주가 명에게 푹 빠졌을 땐 명의 고양이로 인한 알러지가 의심되자 바로 항원 검사를 받는다. 다른 건 다 멀쩡하고 고양이알러지만 있음… 그래도 항히스타민제 먹으면서 꿋꿋이 여자집 방문하고, 의사가 엄청 오래 걸리고 별 소용도 없을 거라는 알러지에 점진적으로 노출하는 치료마저 감수한다. 그렇게나 좋았니…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바꾸려 애쓰는 연애는 지치기 마련이고 명의 고양이 앨리스와 정이 들었으면서도 또 꺼려지기도 하고 태주는 복잡해진다. 아, 예전에 곽재식인지 김중혁인지 어느 작가가 쓴 작법서 같은 거 봤었는데 쓰다 막히면 고양이를 등장시켜라! 이 치트키가 갑자기 생각났다. 이 정도 짬에 고양이 쓰면 반칙 아닌가...
거기에다 태주가 고양이 때문에 빡치는 결정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명과 재하가 사귀던 시절, 둘은 어미 잃은 두 새끼 고양이가 방치된 걸 보고 고민하다가 한 마리씩 나눠 키우기로 한다.
+“고양이 이름이 뭐예요?”
“앨리스요.”
“그럼 여긴 이상한 나라인가요?”
“맞아요. 이상한 나라. 처음에 집 부근 화단에서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비 맞고 떨고 있는 걸 데리고 온 건데, 집안에 고양이가 있는 게 처음이라 이상했거든요. 얘들은 없다가도 갑자기 나타나고, (나중에 슈뢰딩거 드립치는데 재하가 슈뢰딩거가 지명이야? 하니 짜게 식던 명...이과새끼들 죽어라 모를 수도 있지) 눈앞에 있다가도 갑자기 사라지곤 해요. 고양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상한 나라가 된 것 같아서 앨리스라고 이름 붙였어요.”
“두 마리면 다른 고양이는요?”
”재하씨가 데리고 갔어요. 걔 이름은 하나. 앨리스 옆에 있어서 하나.“
”그 영화 좋아해요?“
명은 배시시 웃었다.
“안 봤어요. 제목밖에 몰라요.” (61-62. 나돈데. 제목 밖에 몰라. 하나님 잘 지내나요?)
재하와 명이 헤어진 뒤에도 출장이 잦던 재하가 명에게 하나를 맡기러 오곤 했다. 이 사실을 안 태주는 꼴에 질투심을 느꼈는지 그러지 말라고 지랄지랄을 하고 명은 그냥 고양이 맡기는 문제라고 하고, 그렇지만 명은 태주에게 마음이 많이 끌리는 상태였어서 재하에게 고양이 이제 안 맡아준다고 선 그어 버린다. 고양이 알러지 참기와 전남친 고양이 안 맡아주기가 등가교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애를 시작한 둘은 이성과 꼭 같이 해보고 싶던 걸 읊다가 역시 책처돌이 커밍아웃하는 대목이 나온다.
+“명이 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나 더 있어요. 해본 적 없는 게.“
”뭔데요?“
”같이 책을 읽는 거요.“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같이 못해봤어요?“
”각자 다른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같이 같은 책의 같은 대목을 읽는 거요.“
”어떻게요?“
”몇 줄씩 번갈아가며 소리 내서 읽어보는 거예요. 태주씨는 그래본 적 있어요?“
”나도 없어요.“
”그럼 우리, 같이 책을 읽어볼까요?“
‘우리’라는 말이 태주의 눈앞에서 다시 반짝거렸다.
”재미있을 것 같네요. 무얼 읽을까요?“(밀란 쿤데라 전작 같은 건 하지 마라 새끼들아 사이 나빠진다)
명은 곧바로 대답했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이 나오는 소설 어때요?“
”그게 뭔데요?“
”안나 카레니나.“ (ㅋㅋㅋㅋㅋ나도 읽었어. 나만 다 읽었어…)
명은 또렷하게 발음했다. 너무도 또렷하여 기표가 기의를 압도할 정도였다. (기표 기의 타령 며칠 전에 했었는데…) 명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발화가 안나 카레니나에 담겨 있는 모든 함의를 넘어서는 것 같았다.
“안나 카레니나가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인가요?”
“우리가 좋아하는 나보코프가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이 바로 안나라고 했어요.” (101-102, 나보코프가 또???)
안나 카레니나 나오는 것부터 또 약간 오글거려가지고, 그래도 내가 안 읽었던 다른 번역판으로 기억도 잘 안 나는 부분을 인용해 주는 걸 읽는 건 또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심지어 굳이 이 소설 가지고 온 건 태주랑 브론스키를 겹치려는 복선 내지 빌드업이었다는 거…
사랑의 시작과, 무르익음과, 권태와, 그걸 극복 못하고 금세 사그라든 열정을 꼴랑 160여페이지 안에(작가의 말 빼면 그래) 담아 둔 걸 호다닥 읽는 게 나쁘지 않았다. 너무 얇은 이 책값은 그돈씨...했지만 말이다. 두꺼웠으면 더 빡쳤을 거 같긴 해 잘했어 얇은 건...ㅋㅋㅋ 초점 화자에 가까운 태주의 속마음과 심경 변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말과 행동, 그게 점점 식어 가는 상황 표현 같은게 잘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사도 별 거 없고 그냥 뻔한 연애의 생로병사 일대기 같은 건데도 재미있었다.
작가의 말에서 또 재미있던게 그간 궁금하던 김봉곤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문학동네 편집인으로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이 책의 책임편집을 맡았다. 정영수 아니지 김영수도 같이 편집을 했다. 봉곤이 소설 난 좋아했는데… 예의범절 없이 남의 문자(심지어 문학적임) 허락도 안 받고 복붙한 건 좀 심한 짓이긴 했지만 창작자 하나 매장할 거리인가는 또 많은 생각을 했더랬다. 사과하고 보상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법적 책임을 다하는 거야(이것이 김금희 선생님이 알려주신 사과법) 당사자들 간의 몫이고… 난 몰르겄어….에효 그냥 쓰든 안 쓰든 사랑 많이 하고 잘 살렴…
이렇게 별 기대 없이 얇으니까 빨리 보겠네, 하고 펼쳤다가 너무 뻔한 듯 또 지금 같은 시대에는 이상한 나라에 온 소설마냥 (헌 책방에서 2000년대 초반 소설 아무거나 뽑아다 읽은 것처럼) 난데 없는 부분이 많아서 별로 짜증 안 내고 즐겁게 봤다. 작가님도 나름 노력했다고...유아차라고 했다고...ㅋㅋㅋ 그런데 남자애들은 다 이름 두 자인데 여자애들은 한 자로 명, 경, 연 퉁친게 성의 없고, 남자애들 심리는 (태주는 초점화자라 그렇다고 쳐도,) 엄청 자세하고 섬세하게 잘 그려놨는데 명은 좀 관찰자 입장에서 그냥 사물 같고 대상 같은 느낌으로 캐릭터가 밋밋하게 그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좋아하고 야구 좋아하고 아빠아빠 아빠의 딸이라 자꾸 아빠무새하고 치과의사고(뭣!여기서도 너무 옛날 느낌인게 엄마는 의대 가래고 아빠는 너 하고 싶은 거 하래서 둘을 절충해서 치대에 갔어...라고… 요즘 치대가기 얼마나 개빡센데… 수재네 수재...좋겠다… 페이닥터로 일하다 때려치다 반복함. 그래서 남자애들이랑 자주 놀러다니는 설정 가능) 예쁘고 매력적이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도 그냥 왠일인지 매가리 없이 태주한테도, 심지어 차버린 재하한테도 착하기만 한 느낌이었다. 이건 오래 전에 이언 매큐언 ‘체실 비치에서’ 읽고 야 남자애 속은 자세히도 그려놓고 여자애 속은 아주 블랙박스여? 했던 거랑 비슷할 수도 있겠다.
잘 쓴 소설, 나보코프,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이오네스코, ‘미국의 송어낚시’(이게 누구 책인데 난 몰루), 보니것 같은 이름(이 책에 등장한 작가, 작품들. 이거 말고도 더 있을 걸)을 늘어 놓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처럼 오래 회자되고 사람들 마음에 남는 이야기를 풀어 놓는 건 참 어려운 일 같다. 뭐 모든 글이 그럴 필요도 없고. 저자의 말대로 읽는 동안 잠시라도 마음의 휴식을 누렸으면 이 책은 몫을 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