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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de out
  • 젊은 베르터의 고뇌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9,000원 (10%500)
  • 2012-10-09
  • : 1,254

의외로 고전문학은 20세기보다 19세기 이전의 문학들이 더 쉽게 읽힌다. 적어도 내게는 20세기의 문학들이 더 심오하고 복잡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오래된 작품일수록 버거울 거라는 예상이 깨질 때마다, 슬슬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일부러 피했던 괴테를 이제서야 만났다. 무려 1749년생이라는데 괜스레 예의를 갖춰야 할 것만 같았다는.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절규를 담아낸, 다소 평범하기 그지없는 짝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썩 재미있게 풀어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 또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는데, 남정네들의 뻔한 감정이 아닌 거대한 우주 전쟁과도 같아서였다. 아마도 나 같은 F들은 과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을듯한데.


주인공 베르터는 예비신부인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친구로서 곁에 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고, 그녀의 약혼자와도 가까워져 이중삼중으로 고통이 더해만 갔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커져서 멀리 떠나기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테는 친구라는 명목으로 베르터를 곁에 두고 싶어 했다. 보다시피 짝사랑으로 열병을 앓는 내용이 전부지만 그래서 볼만한 작품이다. 음식도 아는 맛을 자꾸 찾게 되듯이 말이다. 읽는 동안 이 책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본 적 있는 사람이나 몰입하겠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구차해져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공감할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여 베르터의 고뇌가 마치 내 이야기만 같은 착각을 주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행복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이뤄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비겁하고 옹졸한 나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제 삼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첫 연애를 되돌아 볼 때, 갖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파괴한다는 심정이 어떤 건지를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조차 용기가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행위였고, 나같이 자존감 없는 사람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신세한탄과 현실 부정에 그칠 따름이었다. 나 역시 베르터처럼 속내를 고작 글로만 남겨서 응어리를 덜어내곤 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힘들어하느니 되든 안되든 그냥 지르고 볼 것을, 그때는 그렇게 본심을 꺼내기가 두렵고 겁이 났다. 그래서 베르터 혼자 오두방정 떨어대는 모습들이, 누가 보면 구차하고 한심하다 할 그 모습들이 과거의 나를 보는 듯 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로테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양보와 타협이 필요하단 걸 알고 시작한 게임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시작했다면 판을 엎지 않는 이상 결말은 정해져 있으므로, 불리한 입장을 자처한 베르터는 사실 할 말이 없는 게 맞다. 그나마 베르터 정도면 양반이다. 나는 애인이 절친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 간 최악의 경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행복을 만들어가는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지옥도 참 그런 지옥이 없었다. 한국이 총기 소지가 허용되었다면 나도 자살했을지 모르겠다. 정신이 갈 때까지 갔을 때는, 혹여 내가 잘못된다면 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자살한 베르터도 그 같은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비겁한 사랑과 운명의 농간에 반항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베르터가 개츠비처럼 사랑 자체를 숭배한 게 아니냐고 할 텐데 솔직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작중에서 베르터는 자신의 처지와 똑같은 어느 하인을 만난다. 그 하인은 자신의 안주인을 사모하고 있지만 딱히 어쩔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장면을 굳이 넣은 건 베르터의 거울 치료 때문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본 작품을 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실제로 유부녀를 사모한 괴테가, 자기와 똑같은 상황인 친구의 일화를 집어넣은 거였다. 다만 현실에선 친구가 자살했고,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자살한 것으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괴테의 친구가 자살할 때 쓴 총기는, 괴테가 사모하던 여인에게서 빌렸다고 하니 괴테의 죄책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한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라는 현대 명언이 문득 떠오른다.


이 작품은 절반가량이 주인공의 성향을 나타내는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그러니까 메인 테마인 짝사랑만큼이나 인물 묘사의 비중이 높다는 얘기다. 과거 문인들이 대개 그렇듯 베르터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낭만파 중에 낭만파이다. 이웃과 아이들을 사랑하며, 줄곧 적선도 하고, 하인들의 고민도 들어주는 고운 심성을 지녔다. 자연과 시를 사랑하고, 잘려나간 호두나무에 슬퍼했으며, 궁정 상관들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청렴한 사람이었다. 마치 사랑을 누릴 자격은 이런 사람에게나 주어져야 한다는 듯한 무언의 경고로 느껴질 정도. 이렇게 평화와 질서로 살아가는 베르터의 삶에 방문한 전쟁 같은 사랑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과연 베르터에게 사랑의 자격이 있기나 했을까.


로테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찾아오는 베르터를 보고도 어떻게 아무런 의심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니 설마 별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낫겠다. 대체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와 가벼운 말동무나 하고 앉았겠냐. 결국엔 우정을 가장한 별개의 감정이라는 촉이 오지만, 그럼에도 우린 친구일 뿐이라며 아찔한 줄다리기를 이어나가는 그녀. 로테의 남편은 베르터만큼 애정 어린 성격이 아니었기에 베르터와의 묘한 관계를 우정이라는 이름하에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에 악의는 없었지만 베르터에게 일말의 여지를 준 셈이니, 아주 고약하고 잔인한 장난질이라 해야겠다. 물론 유부녀에게 접근한 베르터 역시 또이또이니까, 그래서 이 작품은 페이소스보다 휴머니즘에 초점을 갖게 한다고 생각된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가 지금까지도 영광을 누리는 데에는 해설처럼, 답답한 사회환경에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찾지 못했던 청춘들의 열정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결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삶에 권태를 느낀 사람들이 막혀있던 담을 허물 수 있겠다는 희망의 사실이 중요하다. 이 작품을 통해 괴테가 청춘들의 아픔을 어떻게 대변했고 얼마나 응원했는지 잘 알았다. 어느덧 청춘이라 할만한 나이는 지나버렸지만 괴테를 읽고 가슴이 뛸 수 있어서 참 고마웠다. 베르터 신드롬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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