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4
fade out
  • 나의 친구들
  • 에마뉘엘 보브
  • 12,600원 (10%700)
  • 2023-08-30
  • : 1,362

즐겨보는 어느 유튜버가 말하길, 싱글로 마흔 즈음 살아보니 삶의 재미와 기쁨은 다 식고 허무만이 남았단다. 결국 삶이라는 건 허무와의 싸움이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볼 거 다 해보고 누릴 거 다 누려봤더니 남는 것도 없고, 이젠 뭘 해봐도 자극이 오질 않고,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공허하다는 말이렸다. 나 또한 10대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무슨 얘긴지 아주 잘 안다. 내가 한때는 솔로몬 왕이 쓴 ‘전도서‘를 미친 듯이 읽었거든. 부귀영화와 각종 유희를 누려본 솔로몬 왕은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 했는데, 그것을 나는 교복 입었을 때부터 고민하며 살아왔다. 하여 허무와 투쟁 중인 이번 작품의 주인공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허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이 깨지고 부서지는 것뿐이라고.


에마뉘엘 보브, 처음 듣는 작가인데 2차대전 오기 전까지는 왕성히 활동한 프랑스 작가라는군. 특징이라면 소외된 사람들을 주로 사용했다는 건데, 1800년대의 가난을 묘사했던 에밀 졸라의 뒤를 따라 1900년대의 가난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외‘가 주 무기인 가즈오 이시구로에 비하면 좀 더 날것에 가깝고, ‘가난‘의 아이콘인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꽤 순한 맛이었다. 겨우 한 권 읽고서 이렇다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나의 친구들>은 일상으로 복귀한 참전 군인의 짧은 애가이다. 주인공 빅토르는 3개월에 한 번씩 나오는 국가연금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부상 때문에 직장도 못 구하는데 주변 이웃들은 게을러빠진 무직자라며 비아냥거린다. 차라리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할 만큼 말상대가 필요했던, 순수 우정을 나눌만한 친구 한 명이 절실했던 주인공. 하여 여기저기 말 걸어가며 친구되길 바랐으나 매번 허탕치고 만다.


가볍게 수다를 떨고, 배고플 때 먹고 마시며, 필요하면 서로 돕고 사는 것들. 누군가에겐 평범하다 못해 기본적인 일상의 순간들이 빅토르한테는 낭만이자 꿈과 같은 일들이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벅찬 삶이라면 모를까, 날마다 한가롭다 보니 생각만 많아지고 입은 근질거려 아무라도 붙잡고 싶어지는 거다. 그러나 각박한 사회에서 어떤 접점도 없이 친구를 맺기란 불가하므로, 뭐라도 같이 하면서 감정을 공유했어야 하는데 빅토르에게는 그런 시도가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난 속에 살다가 사춘기 올 즈음에 군복을 입었으니 원만한 대인관계는 당연히 어렵겠지. 거칠고 파괴적인 성격이 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걸. 그러나 저자는 빅토르의 성장 배경보다도 당장의 외로움을 조명한다. 작중에서 다양한 만남이 등장하는데, 빅토르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빅토르 쪽에서 지레짐작으로 선을 그은 때도 많았다. 나 역시 빅토르의 외로움을 가져본 사람인데 이제야 빅토르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겠다. 자신의 외로움이 누군가에게 떠넘겨져서 해결된다고 믿은 거였다. 설령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해도 상대방은 나의 외로움을 책임지고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절실함을 숨겨야만 하는데 그게 어디 쉽냐는 말이지.


내가 이 작품에서 주목한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빅토르가 의외로 여자보다 남자들한테 면역이 없다는 것. 내성적이지만 여자들과 제법 말도 잘 하고 붙임성도 그렇게 나쁘진 않아 보였다. 헌데 남자들과는 이유 불문하고 쩔쩔매는데, 아아,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긴 하다. 그는 애인이 아닌 친구, 그것도 남자인 친구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어떤 낯선 남자든 빅토르에게는 절친 후보감이었고, 마음속에선 이미 10년 지기가 되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들에 사로잡혀있으니 아무리 조심해 봐도 부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이 나와 끝내는 퇴짜를 맞게 되는 법이다. 오히려 여자들을 대할 때처럼 몸에 힘을 뺐으면 좋았을 텐데, 신기하게도 이 친구는 프로그램이 반대로 설정돼 있더라고?


또 하나는, 부상자인 참전 군인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식과 태도이다. 빅토르와 한 건물에 사는 이웃들은, 그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살고 있으며 일을 왜 안 하는지 다 알고 있다. 빅토르가 직접 사정을 말하고 다니므로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의 명예를 알아주진 못할망정 젊은 게 일도 안 구한다며 혐오하고 비하하는 이웃들. 이런 광경이 지금의 한국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놀라웠다. 하이퍼리얼리즘이 뭐 별건가? 이런 게 바로 하이퍼리얼리즘이지.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도 그런 취급을 받는데 소외감이 안 생길 리가 있나. 그러니 이 친구가 매번 뚝딱거리고 과대망상에 빠지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반대로 그를 이렇게 만들고도 나 몰라라 하는 세상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걸 보면 총기난사나 칼부림 같은 폭력 범죄가 생기는 것도 이해는 된다.


고독과 외로움이 다르듯이, 허무와 소외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삶이 안정적일수록 치열함은 멀어지고 목표가 사라지면서 의미를 잃게 된다. 앞서 나도 허무와 부딪혀왔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결핍이라 부르고 싶다. 또한 그 결핍을 채우는 방편으로 호기심을 계속 가져야 한다고 말해본다(그런 뜻에서 결핍을 채운다기 보다 약간 모자란 상태로 두는 게 낫다). 그동안 쾌락과 유희만을 좇았다면 앞으로는 관심사를 학술에 두고서 어느 한 분야에 깊게 파고들 것을 권해본다. 늦게 시작한 공부가 예상외로 자극과 활력을 가져다줄 것이다. 사람은 본업 할 때가 가장 매력 있다는 말도 있던데, 내 관심분야에 열심 내다보면 재미와 멋을 다 가질 수 있고, 결핍도 곧 해결될 것이다. 또 그러다 보면 허무 속에서 삶의 의미도 되찾아진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구원해야만 한다. 빅토르와 과거의 나처럼 외로움을 타인에게 맡기지 말고. 우리의 남은 나날을 권태와 허무 속에 버려두지 말자.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을 ‘사람이 전부다‘라고 해석하는 일은 결코 없길 바라면서 이만 글을 마친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