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 때 선배들과 소위 세미나라는 것을 하면서 이 책의 내용이 토론의 주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1학년 새내기로서 막연히 내가 지식인, 또는 엘리트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세미나 준비를 위해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지금 약 7년이 지나서 이 책을 우연히 다시 읽으면서 그 때 그은 밑줄이 지금 책을 다시 읽는 나에게 가슴 깊숙이 다가오는 내용이라거나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니 말이다.
대학교에 입학한 지 7년이 더 지났지만, 과연 지금 내가 그 때보다 얼마나 더 지식인다워졌는지 - 그런 지식인다움이란 개념이 존재한다면 - 더 근본적으로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면서 사회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돌이켜보면 솔직히 부끄러워진다. 대학 입학후 수년간을 정신없이 보내다가 약간 여유가 생긴 지금 집의 책꽃이를 뒤적이다가 발견한 이 책에 손이 간 것은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항상 하루하루의 일상에 쫓겨서 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정립하지 않고 내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솔직히 내 자신에게 실망도 많이 했다. 그 동안 삶의 경험이나 지식의 증가로 무난히 이 책을 소화해내리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는 거의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사르트르의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냉전의 시대가 사실상 끝난 지금은 조금 구닥다리로 생각될 수도 있긴 하지만, 지식인이 지배계급에게는 통치목적을 위한 하부관리직으로, 노동자계급에게는 지배계급의 앞잡이로 여겨지는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스스로 모순을 지닌 자임을, 그래서 지식인은 사회와 자기자신의 모순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부조리와 끝까지 싸워나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임을,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지식전문가가 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다. 역자의 말처럼 시대가 바뀌면서 지식인의 개념과 역할이 사르트르가 처음 의도한 것과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사회부조리와 억압적 현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 특히 잠재적인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요원한 보편적 평화나 개선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행동으로써 부조리와 싸워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외침은 우리에게 아직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