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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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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랑을 말하는 만화들


최근 한 온라인 서점[아시겠지만, 알라딘입니다]에서 “여성, 젠더, 성폭력, 성추행 관련 도서” 50종을 선정해 둔 것을 보았다. 그 중 만화는 몇 권이나 있을까 살펴보니, 딱 세 권이 있었다. 아쉬운 비율이었지만 마침 모두 읽었고 곧 소개하려고 벼르던 책들이었다.



 

첫 책은 <악어 프로젝트: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맹슬기 옮김, 푸른지식, 2016)이다. 프랑스 만화가 토마 마티외가 인터넷에서 연재한 만화 중 일부를 묶었다. 프로젝트 이름을 ‘악어’로 명명한 것은 이 작품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과 관계있다. 만화 속에서 모든 남성이 연녹색 악어로 표현된다. 달리 말해 만화 속에서 인간으로 그려진 건 죄다 여성이다. ‘여자만 인간이고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악어라니!’ 남자들의 불쾌한 반응이 벌써부터 들리는 듯하다. 사실 나도 불쾌했다. ‘왜 남자만 악어로 그린 거야!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지 끝까지 읽어주겠다!’ 이게 내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작가의 의도는 남자들의 ‘불쾌’ 너머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나처럼 오기를 부리든, 더 그럴싸한 이유를 찾든 끝까지 읽어보길 권한다.




끝까지 읽으며 다다를 수 있었던 ‘불쾌’ 너머에서 나는 공감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질문이 생기기도 했고 다시금 불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불쾌 너머에서 만나는 불쾌함은 처음의 불쾌와는 꽤나 다른 것이었다. <악어 프로젝트> 속에 그려진 모든 이야기가 실제로 여성이 당한 성폭력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남자는 단순히 악어로 그려졌을 뿐이지만, 그림 속의 여자들은 모두 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불쾌함을 경험했단 걸, 그림으로 그려진 그녀들의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기분 좋게 길을 걷던 한 여성의 얼굴이 길거리 성추행 이후 어떻게 눈물범벅이 되는지를, 무척 절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현실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그 현실을 주로 남성이 만들었단 것 역시도.




그러니 남자들이야말로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아, 이 얘기도 빼놓으면 안 되겠다. 이 책의 일부를 얇게 재편집한 소책자 <일상 성폭력 꼼꼼 대응 가이드북>을 무료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책들을 구입하면 인쇄된 가이드북을 받을 수 있다. 가이드북도 무척 잘 정리되어 있으니, 책은 누가 사든 여남소노 할 것 없이 나눠 보고 가이드북은 가까운 여성 지인에게 선물해도 좋을 듯하다. 불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프로젝트 홈페이지(projetcrocodiles.tumblr.com)에서 책에 실리지 않은 에피소드도 시도해볼만 하다.



   


 

<악어 프로젝트>가 프랑스 젠더 현실을 도발적으로 다루었다면,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하겠어?>(박희정 지음, 길찾기, 2012)는 한국의 젠더 현실을 ‘성희롱’을 키워드로 하여 꼼꼼히 짚어낸 책이다. 4년 전부터 이곳저곳 추천하던 책이건만, 이번에 다시 읽으니 완전히 새로웠다. 작년 무렵부터 문제제기가 불붙기 시작해 올해는 더욱 첨예한 논제가 된 ‘여성혐오’와 그것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과거를 통해 복습한 기분이랄까. 성희롱 발언을 사과하라는 요구에 “왜 내가 사과해야 되지? 나에게도 표현할 자유가 있지 않나?”라 대답하는 남성의 말이 너무나 익숙했다. 또 성희롱 예방교육에 참가한 남성들이 한다는 항의가 요즘 여기저기서 들리는 남성들의 목소리와 어찌나 똑같던지. 아래는 모두 이 책에서 발췌한 대사다.


“남자들을 모두 잠재적인 성희롱 가해자로 몰고 있는 거 아닙니까?” / “남자를 너무 죄인 취급하는 것 같아요.” / “난 성희롱을 하지도 않았는데 비난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 “남자라는 이유로 색안경 끼고 보는 시선은 피해의식 아닌가요?”



 

이런 복습을 통해 젠더 불평등을 드러내는 표현들 그 자체보다는, 뭇 남성들의 한결같은 반응이 훨씬 더 문제란 걸 깊이 자각할 수 있었던 건 당연지사다.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복습만큼이나 개인적으로 의미 있었던 것은, 이 책이 담은 반성희롱 운동의 성과와 최근 여성들의 반여성혐오 실천의 성과를 감히 남성인 나도 나름대로 연결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 여성주의 운동이 ‘(직장내) 성희롱’을 법정 용어로 명문화하도록 싸우는 등 다져낸 기반 덕에 사회의 현실과 인식이 조금이나마 바뀌었고, 그 바탕 위에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여성들의 여러 실천이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데이트폭력 같이 가려져 있던 의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소라넷을 폐지하고,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담론의 물꼬를 트는 등 지금 여성들이 살아갈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측면에서 이들의 실천은 과거의 실천과 더불어, 다른 방식의 성과로써 분명한 의미가 있다.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의 또 다른 미덕은 직장생활에서 겪는 차별을 성차와 계급 모두의 구조적/사회적/문화적 문제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지 않고 얽혀 있는 것들을 잘 분간하여 함께 설명하는 것이다. 정규직 여성보다 비정규직 여성이 당하는 성희롱 피해가 더 다양하고 노골적임을 통계 자료와 함께 짚어낸 것이 한 예다. 좋은 논문 여러 편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진지하다. 그러면서도 실제 에피소드를 풍성하게 삽입하여 쉽게 이해되니, 거의 단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책이다. 굳이 하나 꼽자면, 젠더 현실의 일부만을 풍자한 제목이 작품의 너른 의의를 담아내기에 역부족이란 점 정도? 어떤 면에선 출간 시점보다 지금에 더 어울리는, 앞으로도 널리 읽혀야 할 책이다.

 



마지막 책은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레드 로자>다. (케이트 에번스 지음, 박경선 옮김, 산처럼, 2016) 앞선 두 책이 현대 프랑스와 한국의 유사한 젠더 현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포착했다면, <레드 로자>는 100년도 더 넘는 과거 유럽의 젠더 현실을 군데군데 담고 있다. 로자에게 숙녀를 기대한 어머니에 대한 묘사나, 여성의 대학 교육이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에 대한 서술, 그녀가 죽을 때까지 여성에겐 투표권이 전혀 없던 상황 등이 그렇다. 하지만 젠더 문제가 작품이 집중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사실 로자는 19세기 중후반을 살아가기에 힘겨울법한 온갖 소수자성을 한 몸에 안은 인물이었다.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고, 당시에는 사라진 나라 폴란드 출신이었다. 게다가 당대 온 유럽에서 질시 당하던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자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핵심 이론가로 활약했으며 당대의 적대 세력에게는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사후 10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읽히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손꼽힌다. 100년 전 여성에게는 더 어려웠을 현실을, 다른 모든 소수자성을 끌어안은 채로 저처럼 당당히 살아낸 연원이 궁금한 이유다. 짐작에 도움을 줄만한 단서는 이 책 군데군데에서도 발견되고, 34페이지에 이르는 주석을 통해 더 찾아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세 만화는 한국 만화 출판 역사를 통틀어도 희귀한 축에 속할, ‘여성’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담긴 논픽션들이다. 또 지난한 공부와 생각의 흔적이 가득한 노작이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 만화들에는 무엇보다 사랑이 담겨 있다. 세 작품은 꾸준히 인간을 신뢰하며 말을 건다. 자기갱신을, 연대를, 가장 정확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바라본다. 혹 사랑을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것으로 착각한다면, 이 책들에선 조금밖에 발견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들의 사랑이야말로 진짜배기다. 때론 날이 서있고, 눈물을 머금었으며, 매섭고 두렵고 어렵다. 그리고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한 무대 위에 함께 존재하며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걸 이 세 만화는 좀처럼 잊지 않는다. 그러니 무대의 독점을 포기한 용감한 당신이라면, 이제는 함께 있기 위해 공부해야 할 때다. 이 책들은 분명 좋은 출발이다.





2016.6.16 송고

2016.6.28 <주간경향> 1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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