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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칼럼 <만화로 본 세상> 원고를 옮겨둡니다. 이 자리에는 제가 잡은 제목으로 올립니다. 게재본은 '늘' 제목이 바뀝니다.




<송곳>을 건네는 법

 

“혹여 외압에 영영 여기서 뵐 수 없게 될까 걱정했습니다.” 웹툰 <송곳>의 연재가 몇 개월 만에 재개되자 달린 베스트 댓글이다. <송곳>이 ‘외압을 가할 수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불편할지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외압을 가하는 이들’의 힘이 강력하고 또 두렵다는 것 역시 읽힌다. 이처럼 힘 있는 자가 보기에 불편할 내용이 담긴 SNS 게시물에는 “이거 이러다 잡혀가는 거 아냐?” 하는 댓글이 종종 달린다. 같은 맥락이지만 위트와 결기가 조금 더 담긴 댓글도 눈에 띈다. “판사님 저는 이 글을 보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론 억압을 드러내는 풍자이고, 한편으론 발언에 지지를 보내는 용감한 연대의 행위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이처럼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시대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조금은 과한 염려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유의 억압과 탄압은 크게 두려워할 일이 못된다. 실제로 ‘잡혀가는’ 이들은 대개 권력에 반하는 실천을 꾸준히 해왔던 이들이다. 어떤 ‘말’을 해서 잡혀가는 경우는 그 말이 실천으로서 큰 힘을 가지게 되는 경우, 혹은 그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한 본보기에 가깝다. 이를 위해 국가의 힘은 명예훼손이니 유언비어니 하는 식의 제압 방식을 선보인다. 하지만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서처럼 노동자를 향한 전단지를 뿌렸다고 잡혀가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말에 대한 재갈은 지금 시대에는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두려워할 일은 우리의 말이 우리 사이로 퍼지지 않는 일이다. 많은 경우 우리의 말은 마음 맞는 소수 사이에서만 맴돈다. ‘진보’ 혹은 ‘보수’라는 딱지가 붙은 반쪽도 못되는 우리 사이에서, 혹은 문화가 공유되는 각 세대 사이에서, 아니면 성향과 언어가 제각각인 커뮤니티 안에서만 말이 통한다. 경계를 넘어서는 말은 대개 ‘정치색’ 없는 따뜻한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귀여운 이야기다. 그렇지 않은 말이 경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퍼질 때는 반대와 조롱을 위한 인용일 때가 대부분이다. 이 불통의 구조 속에서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말들이 적잖이 힘을 잃고 만다.


많은 화제를 낳으며 드라마로도 방영 중인 <송곳>도, 그런 면에서 보면 작품의 힘이 충분히 발휘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시청률 집계 방식에 허점이 많긴 하지만, 2% 정도의 시청률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현재 웹툰으로 연재 중인 <송곳> 4부의 일간 순위도 28개 작품 중 18위다.(조회순) 일견 잘 나가는 듯 보이고, 잘나갈 이유가 충분한 이 작품이 이처럼 독자-시청자 일부의 사랑만을 받는 것이 나는 무척 불만이다. 이런 상황을 둘러싼 현 사회의 불통 구조가 녹록치 않다 해도, <송곳>은 그것을 뚫어낼 만큼 힘 있는 작품이라고 믿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여, <송곳>을 서로에게 건네는 법을 짧게 정리해 본다. 하고픈 말이 워낙 많은 훌륭한 작품이지만, 지금 많은 이들이 보아두어야 완결 후에 나눌 이야기가 더 풍성해 질테니까.



<송곳>을 건네려면 먼저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에 매혹된 사람만이 건네고 싶어질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선결 과제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송곳>을 몇 회만 본다면 모르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어쩌면 그 가치와 의미가 너무 무겁고 힘겨워서 피하고 싶어질 수는 있다. 그럴 때는 작품 전체보다 부분 부분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를테면, 수두룩한 명대사의 의미를 곱씹어 보고 가치를 부여하면, 그것이 ‘나’의 <송곳>인 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이거다. "지는 건 안 무서워요. 졌을 때 혼자 있는 것이 무섭지. 그냥 옆에 있어요. 그거면 돼요." 삶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이 대사 후로 나는 <송곳>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다음. 그 가치와 의미를 우리에게 낯익은 언어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수인처럼 고지식하게 접근해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를 위한 가장 구고신 소장다운 방법은 <송곳>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의 대사처럼 “권력에서 멀수록 권위를 사랑하”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권위뿐만이 아니다. 작가나 인물의 외모도, 혹은 쓰면 쓸수록 애매한 ‘문학성’이나 ‘재미’와 같은 말들도 “쓸 수 있으면 쓰는” 게 답이다. 노벨문학상 받은 작가의 작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도, 지인들이 재미있다는 영화가 보고 싶은 것도 다 인지상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는 최고 ‘권위자’ 중 한 분의 말을 옮긴다. 모 일간지 대학 평가 2위에 빛나는 서울 소재 명문대학교의 국문학과 교수님께서 SNS에서 하신 말씀이다. “<미생>이 좋았지만 비교할 바 아니라 생각한다. 동어반복적인 한국의 문학상 한둘 쯤은 주옥 같은 대사가 쏟아지는 이 작품에 수여되어야 한다고 본다.” 과연 그렇다.


또 하나, <송곳>의 용법을 알고 그 안에서 써야 한다. 오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나라에서는 무엇이든 주목받기만 하면 바로 오용되고 만다. 키워드 검색이니 뭐니 해서 전혀 관련 없는 데서 ‘송곳’, ‘송곳 이수인’, ‘송곳 결말’ 등의 말들이 등장한다. 질 나쁜 낚시질이다. 하지만 저질 언론만이 이렇게 쓰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송곳> 속 노동탄압이 노무현 정권 때 일어난 일이라며 욕하고, 다른 이들은 <송곳>의 이수인을 보며 ‘원칙주의자’ 노무현이 생각난다고들 말한다.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뒷받침하기 위해 작품의 한 부분을 활용하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우리 모두를 위한 노동권이라는 작품 전체의 주제가 퇴색되고 만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건네는 일이다. 그냥 ‘보라’는 말도 좋지만, 책을 선물하는 건 더 좋겠다. <송곳>이 드라마로 나온 덕에 TV를 같이 보는 일도 건네는 일로 충분히 값한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같이 보자고 말 걸 대상과 나의 관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라는 구고신 소장의 말은 참으로 실용적인 진리다. 내가 옳고 <송곳>이 옳다고 해도, 좋지 않으면 안 들린다. 그러니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권하는 게 최선이다. 노동자인 엄마와 아빠에게, 알바생인 동생에게, 신입사원이 된 친구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책을 사주거나, 같이 드라마를 보자고 권해 보는 거다. 그 후의 반응에 따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토론도 해본다면 가장 좋겠다.


빠트린 게 적지 않겠지만 노파심에 이것만큼은 말해둬야겠다. 우리의 건넴은 <송곳>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송곳>을 건넨 이의 노동하는 삶을 위해서이고,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어갈 ‘노동하기 좋은 세상’을 위해서다. 송곳을 받아 쥐었다고 모두가 찌르고 다니라는 법은 없다. 내 송곳을 품은 채로, 여분의 송곳을 건네 보자. 그렇게 모두가 송곳을 쥐고 있다면, 노동 탄압은 겁나서라도 못하지 않겠나. 그렇게만 된다면 권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송곳>의 말들이 우리 모두의 사이로 흐르게 하자. 두려움을 안고, 조심스럽게. 송곳을 건넬 때는 손잡이를 상대방 쪽으로 향하게 해야 하니까.


2015.11.5 송고

2015.11.17 <주간경향> 1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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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로 만들어본 단어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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