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처럼 아마 이보다 사악하게 시작하는 소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태풍의 계절>의 섬뜩함은 사악함에서 시작해 더 사악한 곳으로 내려가는 데 있지 않다. 한참을 읽고 나서야 우리가 악몽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것들이 실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온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수로에서 ‘마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범인은 곧 윤곽을 드러내지만, 이 소설의 관심은 누가 죽였는가에 있지 않다. 페르난다 멜초르는 살인 하나를 중심에 놓고 그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의 욕망과 혐오, 가난과 성적 폭력, 종교와 미신, 마약과 권태를 끈질기게 파고든다. 하나의 죽음에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마을 전체가 거대한 범죄 현장처럼 보인다.
문장은 숨을 쉬지 않는다. 독백과 욕설, 기억과 소문이 문단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한꺼번에 밀려온다. 처음에는 질식할 것 같지만 이내 그것이 이 소설에 가장 정확한 리듬임을 알게 된다. 누구도 잠시 멈춰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없는 세계에서 문장만 반듯하게 호흡한다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
가장 기이한 것은 현실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이야기가 점점 초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초현실은 현실의 반대말이 아니다. 현실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을 때 얻게 되는 또 하나의 얼굴에 가깝다. 꿈과 욕망, 잔혹함이 뒤섞여 있는데 아무리 기괴해져도 발은 끝내 진흙투성이 현실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마녀’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주술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만든 폭력의 원인을 한 사람의 몸에 뒤집어씌운다. 소녀의 몸에서 벌어진 비극은 주술로 오독되고, 가난은 게으름으로, 욕망은 죄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의 핑계로 번역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죽음에는 마을 전체가 조금씩 가담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몰려오는 태풍은 자연재해라기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존재했던 것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폭력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지 않는다. 습기처럼 벽에 스며 있고, 소문처럼 번지며, 세대에서 세대로 옮겨간다.
그 와중에 마지막의 매장 장면이 이상할 만큼 아늑하다. 이름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한 시체들을 묻으며 건네는 몇 마디의 위로.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늦었고 너무 작지만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