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튀지도 않고 괴물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늙지 않는 몸, 원하는 음식이 나오는 배급기,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육체. 얼핏 천국에 가까워 보이는 조건들을 하나씩 늘어놓은 뒤, 작가는 그 모든 축복에서 단 하나, ‘죽음’만을 제거한다.
그 순간부터 이곳은 지옥이 된다.
100여 쪽이라는 분량도, 실험 일지 같은 건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문체도(작가는 실제로 진화생물학 교수다) 이 소설에서는 이상할 만큼 잘 어울린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장면을 쌓는 대신, 인간의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리와 시간과 경우의 수를 담담하게 계산해 보여준다. 읽는 동안에는 고요한데, 그 숫자들의 의미를 뒤늦게 이해하는 순간 현기증이 온다.
그래서 이 책의 공포는 읽는 순간보다 덮은 뒤에 찾아온다. 쏟아지는 잠과 함께 오늘이 끝난다는 것, 사람이 늙는다는 것, 사랑하는 이와 보낼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아름답게 느껴진다.
짧은 소설이다. 그러나 책의 두께와 독서 경험의 크기가 반드시 비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한 가지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여 인간이 ‘영원’을 견딜 수 있는 존재인지 묻는, 기묘하고 정교한 사고실험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오래 남을 책이다.
제목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는 ‘지옥’이 아니라 어쩌면 ‘짧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