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자퇴 후 페미니즘 서적은 습관처럼 읽었을 뿐이다. 이번 여름 다시 진지하게 수업을 듣고자 했으나 아직도 90년대 후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교수님에게 살짝 실망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붙잡혀간 다른 세미나팀에서 만난 낸시 프레이저 덕분에 오랜만에 제대로 허기를 느끼게 되었다. 거의 30년만에 기름칠한 뇌는 삐거덕거리다 못해 비명같은 쇳소리를 내는 듯 했지만 잊었던 것, 몰랐던 것, 새로 보게 된 것이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물밀듯이 밀려와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다만 이제 미국의 좌파는 학계에만 남아있다는 자조처럼 현실과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었다. 유리천장조차 뚫기 어려운데 고층사무실을 없애자는 건 참 까마득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선명한 선언문을 읽는 건 가슴벅찬 일이다. 명징한 전투성과 진보성, 이분법 패러다임을 깨는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연대 의지가 찬란하다. 하여 그 아름다움에 기대어 다시 다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린 페미니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