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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 해람, 그리고 조선인
  •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 지카우치 유타
  • 16,200원 (10%900)
  • 2025-05-23
  • : 9,046

인간이 어떻게 호혜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 증여과 교환을 비교하며 손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가 어찌나 술술 풀어내시는지, 중간에 비트겐슈타인과 토마스 쿤의 철학이 슬쩍 끼어들었는데도 어려움을 느낄 새가 없다. 이토록 다정한 대중 철학서라니 절로 무릎을 탁 치게 한다. 사실 유발 하바리부터 시작했는데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 했다.


상식이야말로 세계형이고, 패러다임이고, 언어놀이의 수렴적 사고이고, 멘델레예프의 '현상 속의 고유한 영원성'이다. 이를 바탕으로 발산적 사고를 할 때 우리는 진정 변화와 변칙에 예민해질 수 있다. 그러니 더 많은 빈틈을 상상하고 실현해 나가자. 그것이 증여의 논리다.


'인간을 키우려면 부족이 필요했고, 따라서 진화에서 선호된 것은 강한 사회적 결속을 이룰 능력이 있는 존재였다'라는 말은 '작은 책방' 속 단편 '고마운 농부'를 닮았다. 아이에게 끝내 온 마을의 지붕과 난롯가를 남겨준 처든은 트레버의 닮은 꼴이다.


그렇다면 트레버와 처든은 미완성의 신인가? 인과의 역행이 다다르는 종착지에는 그 무엇의 결과도 아닌,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은 적이 없는, 즉 원인이 전혀 없는 동시에 삼라만상을 일으킬 수 있는 궁극적 원인이 존재해야 하고, 그가 바로 부동의 원동자, 신이라는 아퀴나스의 믿음을 곱씹어보자. 세상의 근본에 원인이 있기를 바라는 기독교 신학자의 욕망과 달리, 난 이 모든 건이 결국 우연을 필연으로 이끌어온 인간의 의지라고 여긴다.


생각해 볼 대목 1.

증여의 수취 거부는 관계의 거부이다. 젊은 날 거절해왔던 선물과 친절을 생각해보면 내가 철벽을 치고 살아온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정말 증여였을까? 난 지금도 그들이 교환을 원했다고 생각하고 신뢰하지 못했다. 썸타는 사이라면 더치페이가 기본인 거고, 신뢰가 싹 터야 관계도 성립된다. 


2.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도와줘'라는 말을 하기 쉽지 않은 교환 중심의 사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하는 증여는 자본주의를 반하지 않고, 그 빈 틈만을 노린다. 그게 정말 최선일까?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는 공을 붙잡고 원래 위치로 돌려놓으려 하는 외력, 내 식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법, 제도, 사회구조는 결국 자본주의의 경제력이 바탕이 되야 하는 것일까? 이름 없는 영웅, 가령 청소부가 주인 되는 세상을 주장하는 건 불가능한가?


3.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사회란 자신의 존재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사회이다. 관계에 대한 나의 결벽증은 조직사업에 부적합하다는 걸 또 한 번 깨닫게 한다. 나를 갈아넣을 순 있어도, 남에게 나와 같이 하기를 권하는 건 참 조심스럽다. 결국 난 나만 책임지겠다는 건 지도 모르겠다. 


4. 부모 자식 관계의 강한 증여성이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저자의 경고는 과한 감이 있다. 아이 없는 독신남, 혹은 부모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자라 교수까지 된 일본 남자는 이중 구속에 시달리며 살았구나 싶다. 아마도 그의 부모는 산타클로스 뒤에 숨지 않았던 게 아닐까.


5. 쓸 데 없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즉 그 말에 더 많은 자원을 들일수록 '더 많은 경의'를 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본다. 즉문즉답, 미사여구와 공치사가 없는 건조한 대화를 선호하는 나라는 사람은 인간은 믿어도 개인에게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다. 겉치레 예의를 혐오하는 건 나 자신에 대한 혐오를 닮았고, 자기혐오와 불신은 자만심의 비뚤어진 반사라는 걸 잊지 말자. 이제 예의차린 말도 좀 배워보자. 타인의 언어놀이에 참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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